시릴 라마포사 남아공대통령이 지난달 23일 영국을 국빈방문해 런던의 왕립식물원을 둘러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개인농장에 뭉칫돈을 숨겨온 사실이 드러나 정치적 곤경에 놓인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사퇴할 뜻이 없다”며 정면돌파에 나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당분간 정치 혼란이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빈센트 마궤니아 대통령실 대변인은 3일(현지시각) 최근 국회에 제출된 조사보고서와 관련해 “라마포사 대통령은 잘못된 보고서 때문에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영국 <비비시>(BBC)가 보도했다. 마퀘니아 대변인은 또 “이처럼 명백히 결함투성이인 보고서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라마포사 대통령을 넘어 우리 헌법 민주주의의 장기적 이익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라마포사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은 지난 6월 아서 프레이저 전 정보기관 책임자의 폭로에서 비롯했다. 그는 라마포사 대통령이 개인농장의 소파에 현금 400만달러(52억원)을 숨겨놓았다가 도난당하고도 불법적인 ‘검은돈’이 드러날까 봐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뭉칫돈을 개인농장 소파에 숨긴 배경과 돈의 출처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자 지난 9월 의회의 요청으로 전직 대법원장을 포함한 법률 전문가 세 명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2018년 제이콥 주마 당시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사임한 뒤 ‘부패 척결’을 앞세워 당선됐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번 논란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조사위원회에 낸 소명서에서 ‘도둑맞은 돈이 400만달러가 아니라 58만달러(7억5천만원)로 이는 지난 2019년 말 수단 국적의 사업가에게 버팔로를 팔아 받은 돈’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애초 농장 관리인이 돈을 금고에 보관하다가 대통령 주거지가 안전하다고 여겨 보조 침실의 소파로 옮긴 것’이라며 잘못한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사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문제의 뭉칫돈이 버팔로 판매 대금인지 확인할 수 없다”며 “라마포사 대통령이 선서와 달리 법과 헌법을 위반했을 수 있다”고 탄핵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에 따라 야당뿐 아니라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일부에서도 사임 요구가 나오고 있다. 야당 연합은 성명을 내어 “우리 헌법과 법에 의한 지배를 지키기 위해 남아공 국민 모두 함께 단합할 것을 요구한다”며 라마포사 대통령을 압박했다.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도 제이콥 주마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중심이 돼 라마포사 대통령의 사퇴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다.
그러나 라마포사 대통령이 사임을 거부하며 그의 정치 운명은 아프리카민족회의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게 됐다. 현재 여당은 의회 의석의 60% 가까이 차지하고 있어, 이들이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이상 라마포사 대통령을 탄핵할 방법이 없다. 아프리카민족회의는 4~5일 잇따라 주요 당직자 회의를 열어 당대표이기도 한 라마포사 대통령의 진로를 둘러싸고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국회는 6일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채택할지 표결한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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