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현지시각) 이란 테헤란에서 한 시민이 마흐사 아미니의 얼굴이 그려진 이란 잡지를 들고 있다. 평범한 이란 여성이었던 아미니는 지난해 9월 히잡 착용 미비로 도덕경찰에 붙잡혔다 숨지면서 이란 전역에서 자유와 저항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테헤란/AFP 연합뉴스
세계 여성의 날 이틀 전인 지난 6일 이란 사법당국은 이란의 ‘여성인권 시계’를 반년 전으로 되돌리는 충격적인 발표를 내놨다. 사법부 수장인 골람호세인 모흐세니 에제이는 “이슬람 복장 규율을 어기는 여성은 처벌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시작된 ‘히잡 반대’ 시위가 이란 전역을 휩쓴 지 반년 만에 이란 정부가 이 투쟁을 사실상 제압했음을 알리는 공식적인 ‘승리 선언’을 내놓은 셈이다. 그는 “히잡을 벗는 것은 이슬람 공화국과 가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그러한 비정상적 행동에 동참하는 이들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잡혔다 사흘 만에 숨진 마흐사 아미니(숨질 당시 22살)의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17일로 반년째를 맞았다. 이 시위는 한때 1979년 시작된 이란의 이슬람 신정 체제의 전복을 넘본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예전 같은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달 반여 전인 1월31일 “이란의 거리시위가 조용한 반란으로 바뀌었다”고 진단했지만, 여러 저항의 흐름을 한데 묶어 연대하려는 새로운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 테러 규탄하면서도 히잡은 써라?
한때 시위의 ‘주체’였던 젊은 여성들은 이제 독극물 테러를 당하는 ‘객체’로 밀려났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란 전국의 여학교 수백곳에서 유독가스 테러가 일어나 수천명의 학생이 큰 피해를 입었다. 피해 학생들은 구토·어지러움·마비 증상 등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피해 규모가 상당했지만, 여학생들을 노린 이 테러가 외부로 드러난 것은 2월 말이 되어서였다. 이 연속 테러의 배후는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히잡 시위에 반감을 가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히잡 시위에 대한 물리적인 ‘백래시’(반격)였다.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이 사건이 전세계적으로 알려지자 “엄중한 대응”을 공언했다. 실제 이란 당국은 최근 테러 관련자 110여명을 잡아들였다.
이란 정부가 “복장 규율을 어기면 처벌하겠다”는 강경 방침을 밝히면서 독극물 테러엔 “엄중 대응”하고 있는 것은 일견 모순되게 보인다. 하지만 이란 내부의 사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때 체제를 위협했던 반정부 시위를 이겨냈다는 이란 정부의 자신감을 느낄 수 있다.
이란 정부는 시위가 발생한 초기엔 이를 ‘서방의 음모’라 폄하했다. 하메네이는 시위가 시작된 지 보름여 뒤인 10월3일 반정부 시위에 대해 ‘폭동’이라 규정하며 그 배후에 “미국과 이스라엘”이 있다고 규정했다. 대규모 시위로 인해 내부적으로 정통성의 위기를 맞자 외부의 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도 저항의 불길이 잡히지 않자 ‘폭동’에 가담한 이들을 대규모로 잡아들이고 사형 집행도 서슴지 않았다. 나아가 이란 정부는 올해 초에는 8년 만에 경찰 수장을 교체하며 강경파로 분류되는 이를 앉혔다. 시위에 더욱 고압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러면서도 유화책도 함께 내놨다. 히잡을 단속하는 ‘도덕경찰’의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자 모하마드 자파르 몬타제리 이란 검찰총장은 지난해 12월3일 도덕경찰은 사법부와는 무관하다며, 폐지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실제 단속이 크게 줄어 테헤란 등 대도시에선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 여성들의 모습이 증가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테헤란/타스 연합뉴스
시위가 시작된 지 반년 동안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다가 사형된 것으로 공식 확인된 이는 4명이다. 인권단체들은 그 밖에 시위 진압 과정에서 500여명이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의 탄압으로 시위의 기세가 꺾이자 이란 당국은 지난 1월께부터 히잡 단속을 다시 강화하게 된다. 이란 반관영 <이스나>(ISNA) 통신은 지난 1월10일 검찰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부적절한 히잡 착용을 ‘범죄’로 단정하고, 금고형·벌금·사회봉사활동·출국금지 등 처벌을 강화한 것이다. 한편 이란 정부는 13일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금됐던 2만2천명을 사면했다. 시위가 더는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와 동시에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행보는 노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반정부 시위 진압의 최전선에 나선 혁명수비대 산하 바시지 민병대를 격려했고, 지난달엔 9살 안팎 소녀들이 히잡을 쓰기 시작하는 ‘타클리프’ 행사에 참석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달 22일 “이슬람 혁명 이후 가장 강렬한 시위에서 이란의 최고지도자는 당국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받아들였다”며 “변화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하메네이가 1979년 이후 이란을 통치해온 신정 체제를 바꾸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는 없다”고 분석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배경엔 반정부 정치세력 등이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구심점을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란 지적이 있다. 히잡 시위는 처음엔 여성인권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경제난 등 다양한 의제를 흡수해 갔다. 지역·계층을 가리지 않고 시위가 확대되며 ‘하메네이에게 죽음을’ 같은 급진적인 구호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런 요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구심력 있는 정치세력이 부족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거센 시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현실성 있는 대안 제시나 야권 지도자의 등장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14일(현지시각)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시민들이 불을 피우고 춤을 추며 ‘차하르샨베 수리’ 축제를 즐기고 있다. 테헤란/AFP 연합뉴스
■ 반정부 연대 결성…“새로운 물결 예고”
하지만 올해 들어 저항 흐름을 한데 묶으려는 노력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란 정부가 공식 발표한 마지막 사형 집행은 1월7일이다. 이날로부터 40일이 되던 지난달 중순 수도 테헤란과 제2 도시 마슈하드에서 시위가 열렸다. 이날 이란의 노동조합, 페미니스트 단체, 학생 조직 등 20개 단체는 정치범 석방, 표현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아레츠>는 “이들의 요구는 정부 입장에선 사실상 체제 변화였다. 정부가 동의하지 않을 것을 이들도 알고 있었다”며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시위 지도부를 만들겠다는 의지이고 많은 이들이 새로운 물결을 예고한다고 믿는다”고 짚었다.
비슷한 시기 ‘이란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연합’이라는 이름의 모임도 결성됐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변호사이자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와 이슬람 혁명 당시 축출된 팔레비 왕조 후계자인 레자 팔레비 등을 주축으로 한 이들은 히잡 시위를 촉발한 마흐사 아미니의 이름을 딴 ‘마흐사 헌장’을 발표했다. 이슬람 국가인 이란을 민주국가로 바꿀 것을 요구하면서 △사형제·차별·혁명수비대 폐지 △유엔 협약 가입 등을 주장하고 있다. 국외에서 활동하며 국제사회의 지원과 이란에 대한 압박을 끌어내겠다는 게 이들의 계획이다.
이란의 전통적인 불꽃 축제 ‘차하르샨베 수리’(Chaharshanbe Suri) 기간인 14일, 테헤란 등지에선 시위대가 보안군을 향해 폭죽을 던지며 항의하거나 히잡을 태우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온라인상에 퍼졌다. 이슬람 당국은 반정부 시위 이전에도 이 축제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금기시해왔다. 춘분을 기점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이란 사람들은 나쁜 기운을 막는다는 의미로 모닥불을 피우고 이를 뛰어넘으며 논다. 불의 밝은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이란의 반정부 시위는 모닥불을 뛰어넘듯 신정 체제의 억압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복장 규율을 어기면 처벌받을 것이라는 서슬 퍼런 선언에도 6개월 전보다 많은 여성들이 히잡을 거부하고 있다. 32살의 산부인과 의사 아쌀은 여성의 날인 8일 <자유유럽방송>에 히잡 없이 거리를 걷는 일이 “온몸을 떨리게” 한다면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 저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해영 기자
hy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