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수술 뒤 치료 중 사망한 25일, 이집트 북동부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한 시민이 벽에 붙은 무바라크의 대형 초상 사진을 찢고 있다. 알렉산드리아/로이터 연합뉴스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로 축출되기 전까지 이집트를 30년간 철권통치했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25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91.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외과수술에 이어 집중치료실에서 치료를 받은 지 몇 주 만인 이날 숨을 거뒀다고 이집트 국영방송과 외신들이 보도했다. 무바라크의 매제인 무니르 타베트 장군은 무바라크가 이집트 수도의 갈라 군인 병원에서 타계했다고 확인해 줬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전했다. 이날 늦게 이집트 군부도 “이집트군의 아들 중 하나이자 전쟁 지도자”인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변인 성명을 냈다.
무바라크는 공군 참모총장이던 1973년 아랍 연합국과 이스라엘이 맞붙은 ‘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 명성에 힘입어 1975년 안와르 사다트 정부의 부통령으로 발탁됐고, 1979년 집권 국민민주당(NDP) 부의장에 선출되면서 사다트의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1981년 10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 암살되자 무바라크는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집권 초기에는 친미와 친소 균형 노선을 취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중동평화협상을 중재했고, 1982년엔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빼앗긴 시나이 반도를 반환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 냉전 해체 이후에는 노골적인 친미·친이스라엘 노선을 유지했다.
2002년 3월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오른쪽 선글라스)이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과 함께 수도 카이로 인근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등 고대 유적지를 둘러보고 있다. 기자/AFP 연합뉴스
무바라크 집권 30년 동안 이집트 정치와 경제는 반민주적 독재와 부패한 정실·족벌 경제로 얼룩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무바라크는 집권 시기 내내 계엄체제를 유지하며 ‘현대판 파라오’로 불릴 만큼 절대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2011년 초부터 중동·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을 휩쓴 ‘아랍의 봄’ 민중 봉기가 이집트에서도 거세게 일면서, 시위 3주만인 그해 2월 무바라크는 결국 민중의 힘에 밀린 군부에 의해 축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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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2012년 재판에서 무바라크는 시위대 학살 혐의로 사실상의 종신형인 징역 25년을 선고받았으나 불복해 항소했다. 2015년 재심법원은 원심을 확정했으나 고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석방해 가택연금에 처했다. 2017년 항소심 법원은 그의 살인 혐의에 대해 아예 무죄를 선고하고 사면했다. 앞서 2016년 1월 무바라크는 두 아들과 함께 공금 횡령과 부정축재 등 부패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무바라크는 2011년 권좌에서 쫓겨나 체포된 뒤 2017년 풀려나기까지 약 6년의 대부분 기간을 병원 내 감방에서 보냈으며, 이후에는 카이로의 한 아파트에서 투병생활을 하며 지냈다.
무바라크 축출 뒤 처음 치러진 2012년 대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민선 대통령으로 집권했으나, 불과 1년여만인 이듬해 7월 이집트 군부는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시 정권을 뒤엎고 권력을 장악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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