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대통령 후보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투표일인 9일 바탁 마리아노 마르코스 기념 초등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투표한 뒤 보도진을 지나 퇴장하고 있다. 바탁/AFP 연합뉴스
필리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인 9일 오전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 북부 바탁시의 마리아노 마르코스 기념 초등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작열하는 폭염 아래서 주민들은 끈기 있게 차례를 기다렸다. 잠시 뒤 하얀색 대형 밴이 등장해, 한 가족이 차에서 내리자 곳곳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64) 대선 후보와 그의 어머니인 이멜다 마르코스(92). 21년간의 장기독재 끝에 1986년 ‘피플스 파워’ 시민혁명으로 축출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집권 기간 1965~1986)의 가족이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 일명 ‘봉봉’은 이번 대선을 앞두고 실시된 여러 여론조사에서 다른 후보들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독재자의 아들이 귀환한다는 사실은 혁명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필리핀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퇴행해 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 사라 두테르테(43) 역시 포퓰리즘적인 권위주의 통치자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로 당선이 유력하다.
필리핀의 장기집권 독재자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9일 자신의 아들이 유력 후보로 출마한 대선에서 투표하려고 가족들과 함께 바탁의 마리아노 마르코스 기념 초등학교에 도착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마르코스 주니어는 현지 여론조사 기관인 ‘펄스 아시아’가 지난달 16~21일 2400명을 대상으로 한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56%의 지지율을 기록해 레니 로브레도(57·지지율 23%) 부통령 등 경쟁 후보에 비해 20%포인트 이상 앞서는 중이다. 사라 두테르테 역시 55%의 지지율로 18%인 비센테 소토 상원의장을 37%포인트 격차로 따돌리고 있다.
이번 선거의 막판 변수는 전 국민의 80%가 믿는 가톨릭교회 사제들이 로브레도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4일 주교 10여명 등 사제 1400명이 로브레도 지지를 공개 선언했고, 그다음날에도 수백명의 사제들이 뒤를 이었다. 또 필리핀은 여론조사의 정확도가 떨어져, ‘깜짝 이변’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변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마르코스 주니어의 등장은 6년 전 두테르테 대통령 당선으로 예고됐다. 1990년대부터 정계에 발을 디딘 마르코스는 주지사, 상원의원을 거쳐서 2016년 대선에서 두테르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출마했다. 당시 부통령 선거에서 현 부통령인 로브레도에게 패했으나 이번 대선에선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다.
두테르테는 집권 뒤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 필리핀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범죄를 소탕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통해 국민들의 큰 인기와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식 재판도 없이 수많은 이들을 사살했고, 반대자를 탄압하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행태를 보였다. 진보적인 시민사회는 반발했고, 국제 사회는 비난을 쏟아냈다. 두테르테의 ‘마약과의 전쟁’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 시절의 ‘계엄령’ 통치와 비교됐다.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후보가 9일 자신이 시장으로 재직하는 다바오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투표한 뒤 잉크가 묻는 손가락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번 필리핀 대선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이다. AP 연합뉴스
인권활동가 마일스 산체스(42)의 가족은 마르코스의 계엄령과 두테르테의 마약과의 전쟁으로 두 세대에 걸친 피해를 입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했다. 1980년대 초 마르코스의 계엄군에 의해 할머니는 성폭행을 당했고, 할아버지는 고문을 당했다. 두테르테 시절에는 남매들이 마약 사범으로 몰려서 즉결 처형됐다.
전·현직 권위주의 통치자의 아들과 딸이 짝을 이뤄 정·부통령 당선이 임박한 필리핀의 현실은 1980년대 시민혁명 이후에도 ‘올리가르히’라 불리는 과두세력의 지배가 이어지며 빈부 격차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시민들의 절망을 반영한다.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서민들의 깊은 좌절이 마르코스와 두테르테가 결합된 ‘강력한 통치’를 희구하는 표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게다가 필리핀 유권자의 60%는 마르코스 통치 시절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마르코스가 당선되면 나라가 좋아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이번 선거에서 별다른 공약을 내세우지 않았다. 아버지의 철권통치기가 필리핀의 황금기였다고 미화하는 한편 경쟁 후보인 로브레도를 비난하는 온라인 선거운동에 주력했다. 약 6500만명의 유권자가 등록된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80%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개표에 시간이 걸려 승자가 확정되려면 며칠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