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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시아·태평양

달콤하게 또는 알싸하게 낯선 곳의 빗장을 열다

등록 2020-11-14 11:53수정 2020-11-14 12:05

[토요판] 랜선 동남아
③ 후추와 향료, 설탕의 동남아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후추
조공 바치고 사치품 받아오기도
동남아 식민지화도 향료와 관련

아시아 설탕 주 공급지도 동남아
2세기부터 중국에 불교까지 전해
진주·상아·설탕 등 ‘달달한 포교’
설탕을 만들기 위해 사탕수수를 고고 있는 캄보디아 어린이. 강희정 제공
설탕을 만들기 위해 사탕수수를 고고 있는 캄보디아 어린이. 강희정 제공

초록색 작은 열매다. 한 알을 입에 넣어 조심스레 씹는 순간, 작은 알갱이가 톡 터지면서 화한 향기가 미각을 자극한다. 후추였다. 캄보디아 시엠립(시엠레아프)의 작은 식당이었다. 후추는 현대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빠지지 않고 쓰이는 대표적 향신료 중 하나이다. 후추의 원산지는 인도 남부라고 알려졌지만 인류의 식생활을 지배할 정도로 퍼지게 된 것은 동남아산 후추 덕이다. 동남아 몇몇 지방은 초록의 어린 후추 열매도 기름에 볶아 먹는다. 작은 포도알처럼 송알송알 달린 후추를 통째로 조리한다. 우리가 흔히 먹는 검은 통후추는 이 후추 알갱이를 끓는 물에 10분 정도 담갔다가 말린 것이지만 잘 익은 후추는 매혹적인 붉은색이다. 검은 후추의 껍질을 벗긴 것이 백후추가 된다. 우리는 향신료의 역사도 서양사를 통해 알고 있지만 아시아는 사정이 달랐다. 풍성한 자원의 보고, 동남아의 산물은 아시아 문화를 기저에서 바꿔놓았다. 후추도 그중 하나이다.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간 후추

유럽에 처음 전해진 후추는 아랍 상인들이 인도산 후추를 비싼 값에 판 데서 시작됐고, 동아시아로 전해진 후추는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보내 널리 퍼진 것이다. 물건의 값은 그 희소가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 구하기 어려운 그 옛날의 후추가 금은보화보다 비쌌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고기 누린내를 없애주고, 소화를 돕는 후추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 그에 열광한 것도 당연하다. 중국의 기록에는 이른 시기부터 후추 이야기가 나온다. 정사에 나오는 가장 이른 후추 이야기는 후추가 인도의 산물이라는 <후한서> 기록이다. 아마도 한나라 때 처음 후추를 접한 모양이지만 쉽게 구하기 어려웠음은 분명하다. 이후 역사는 오래도록 후추에 관해 침묵한다.

후추 열매. 강희정 제공
후추 열매. 강희정 제공

후추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송사>이다. 송나라 태종 대인 995년에 점성(짬파), 즉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에 있던 나라에서 후추 200근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이후로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후추를 조공했다는 기록이 드물지 않게 나온다. 명나라 홍무제 때인 1382년과 1387년에는 각각 조와국과 섬라에서 7만5천근과 1만근을, 1390년에는 강향(降香)과 후추를 17만근이나 보냈다. 조와는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자바이고, 섬라는 태국(타이)이다. 손이 커도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중국의 권위에 눌려 막대한 물량 공세로 선린관계를 맺으려는 의도였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중국 역사이니 ‘조공’이라고 썼지만 사실상 무역이다. 가는 것만큼 오는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동남아에서는 후추만이 아니라 다양한 향신료와 향목, 공작새와 깃털, 코뿔소 뿔과 바다거북 등딱지를 가져갔고, 그 대가로 중국 황실은 막대한 양의 비단과 서책, 한약, 도자기를 내주었다. 값진 중국 물품들은 다시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왕국의 위세를 과시하는 물품이 되었다. 물자가 풍부한 현재는 별것 아닌 물건들이지만 이것들은 당시 쉽게 구하기 힘든 사치품이자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으니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물량을 가져가서 많이 받아오는 게 상책이었다. 교통이 불편하면 불편할수록 이런 물건들의 가치는 하늘로 치솟는 법이다. 결국 조공은 중국과의 공식적 교역 방법이었고, 동남아는 이를 통해 이문을 남기는 법을 깨쳤다. 이로써 자신들의 상업적 기반을 다진 것은 물론이다. 바다를 통해 남아시아와 서아시아, 그리고 동북아시아로 오갈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까닭에 동남아는 교역에 유리한 지리적인 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여기에는 열대라는 기후와 지형, 화산 지대라는 자연조건에 따른 동남아만의 독특한 자원도 큰 몫을 했다.

후추 외에도 정향(丁香), 강황, 육두구(肉荳蔲, nutmeg), 계피 등 동남아의 산물이 교역되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신안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는 작은 병에 담긴 정향이 발견되었다. 신안의 난파선은 1323년 중국 닝보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이었다. 전세계에서 단 한곳, 말루쿠제도에서만 나는 향료였던 정향이 원나라 배에서 나왔다는 것은 원대 중국에서 이미 중계무역을 할 만큼 많은 물량의 정향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동남아의 정향을 상품으로 팔았던 것은 중국만이 아니었다. 신라 역시 일본에 정향을 팔았다. 752년 일본에 건너간 신라 왕족 김태렴(金泰廉)의 사절단에게 일본인들이 주문한 물품 목록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도 정향이 들어 있다. 동아시아, 중국과 한국의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산 정향을 오랫동안 일본에 팔았던 것이다. 못처럼 생겼다고 해서 정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식물은 지금은 중국 남부 하이난에서도 재배가 되지만 원래 말루쿠제도에서 자생하는 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린 것이다. 정향을 독점하기 위해 원산지인 말루쿠제도를 둘러싼 서구 열강의 쟁탈전은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야기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동쪽 끝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말루쿠제도는 향료제도라고 불렸다. 정향, 육두구, 육두구 껍질인 메이스(mace) 등 값비싼 향료가 나는 섬들이다. 아랍 상인들에 의해 향료를 접하게 된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 이후 향신료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 다른 나라보다 먼저 향료를 독점하려 했던 포르투갈은 인도 고아(Goa)를 점령해 아시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원산지를 확보해야만 향료를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곧 향료제도로 향했다. 향료제도의 중요한 섬인 트르나테에서 포르투갈이 처음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현지 술탄과의 마찰로 금세 추방되었고, 연이어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이 뛰어들어 현지에서 각축을 벌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보에 참여했던 마젤란도 스페인 국왕의 후원을 받아 향료제도로 항해하다 필리핀 막탄섬의 한 부족과 전투 중 사망했다. 그의 선단 중 두척이 1521년 향료제도에 도착해 향료를 가득 싣고 돌아갔고, 스페인은 1526년 제도의 다른 섬 티도레에 요새를 지었다. 오로지 향료무역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존 밀턴(1608~74)은 <실낙원>(1667)에서 날아오르는 사탄의 모습을 트르나테와 티도레의 섬에서 향료를 싣고 무역풍을 타서 항해하는 배처럼 보인다고 비유한 바 있다. 17세기 영국 시인이 알고 있었던 향료제도의 섬 이름이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다는 것은 우리 지식의 불균형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서구 제국의 향료제도 쟁탈전은 1667년 티도레의 술탄이 네덜란드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트르나테를 차지하여 말루쿠제도 북부의 모든 교역을 지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향료가 동남아의 식민지화를 부추겼다고 볼 수도 있다.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기도 했다지만.

라바나를 물리친 시바. 10세기, 캄보디아 시엠립 반테아이스레이. 고대 동남아에는 불교보다 힌두교가 성행한 흔적이 많다. 태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남부 곳곳에서 힌두교의 비슈누와 하리하라가 발굴되고 사원이나 건물 유적에는 시바 링가가 남아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해상교역 초기,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사절단을 보낼 때는 승려가 동행하거나 불교 물품을 가져간 경우가 많았다. 강희정 제공
라바나를 물리친 시바. 10세기, 캄보디아 시엠립 반테아이스레이. 고대 동남아에는 불교보다 힌두교가 성행한 흔적이 많다. 태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남부 곳곳에서 힌두교의 비슈누와 하리하라가 발굴되고 사원이나 건물 유적에는 시바 링가가 남아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해상교역 초기,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사절단을 보낼 때는 승려가 동행하거나 불교 물품을 가져간 경우가 많았다. 강희정 제공

중국에 제당기술을 전파하다

정향을 둘러싼 향료 독점의 욕망이 동남아의 식민지화를 촉진했지만 향료가 다는 아니다. 지금도 광물과 목재, 석유 등 풍부한 자원으로 세계 많은 나라에서 동남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지만 딱히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동남아의 산물이 설탕이다. 삼백 산업이라 불렸던 밀가루, 면직물, 설탕은 1950년대 미국의 대표적 원조물자였다. 미국 설탕은 중남미산이었지만 사탕수수농장을 식민지에 건설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이주시키기 전, 아시아 설탕의 주 공급지는 동남아였다. 모든 음식에 만병통치약처럼 설탕을 과다하게 넣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 지 오래지만 설탕이 우리 식생활에 깊이 파고든 것은 불과 몇십년에 이뤄진 일이다.

설탕도 그 시작은 인도였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인도의 설탕을 수입해 먹기 시작했는데 인도에서 사탕수수를 보고 꽃도, 벌도 없이 꿀이 만들어진다며 신기해했다고 한다. 대대적인 사탕수수의 재배와 설탕 제당은 동남아에서 성공했다. 고추와 고무나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동남아시아로 전해진 것이지만 설탕은 동남아에서 신대륙으로 전파된 것이다. 실제로 사탕수수는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필리핀, 그리고 중국 남부에서 자란다. 하지만 중국에 설탕이 유입된 것은 후추처럼 동남아의 조공에 의한 것이었고, 남제(南齊, 479∼502) 때 이미 푸난(캄보디아)의 특산물이 사탕수수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후대 기록에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자바, 캄보디아 특산이 사탕수수이며, 이들 나라에서 설탕을 만들어 중국에 보냈던 것이 확인된다. 974년 슈리비자야에서 백설탕을, 비슷한 시기 자바에서 설탕을 보낸 일이 그것이다.

대략 10세기까지 중국에는 제당기술이 없었다. 당 태종은 두번이나 인도로 사신을 보내 설탕 졸이는 방법을 알아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양주(揚州)에다 여러 종류의 사탕수수를 올리라 명을 내려 그 즙을 짜서 한약 달이듯이 졸였는데 서역을 통해 인도에서 들어온 것과 달리 맛이 없었다고 <신당서>(新唐書)는 전한다. 사탕수수 재배법은 배울 수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정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송 이전까지 설탕 공급은 동남아 담당이었다. 이 시기 미얀마에 있었던 퓨 왕국에서 당에 악기와 악공을 보내 음악을 바쳤는데, 그중 하나가 ‘감자왕’(甘蔗王)이다. 감자는 달콤한 사탕수수라는 뜻이고, 이 음악은 부처의 법이 달콤한 사탕수수처럼 백성을 가르치니 모두가 그 맛을 즐긴다는 내용이다.

신안선에서 나온 정향이 담긴 작은 병. 1323년 이전. 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신안선에서 나온 정향이 담긴 작은 병. 1323년 이전. 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다양한 향신료들. 강희정 제공
다양한 향신료들. 강희정 제공

우리는 불교가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고, 그 핵심은 대승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2세기부터 남방 해로를 통해 불교가 전파되었다. 중국 남부로 전해진 불교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오나라 손권이 귀의했던 승려 강승회(康僧會)도 하노이에서 출가하고 오나라로 들어갔고, 적지 않은 승려들이 하노이를 거쳐 중국으로 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불교는 단순히 부처의 말씀, 즉 경전과 사상만을 전하지 않았다. 불교와 함께 기존에 동아시아에는 없었거나, 있어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다양한 물건들이 새롭게 소개되었다.

설탕도 그중 하나였다. 현재 발굴되는 유물로 보면 고대 동남아에는 불교보다 힌두교가 성행한 흔적이 많다. 태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남부 곳곳에서 힌두교의 비슈누와 하리하라가 발굴되고 사원이나 건물 유적에는 시바 링가가 남아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4세기의 중국 구법승 법현(法顯)도 <불국기>(佛國記)에서 현지에 외도(外徒), 즉 이교도가 많다고 썼다. 하지만 해상교역 초기,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사절단을 보낼 때는 승려가 동행하거나 불교 물품을 가져간 경우가 많았다. 중국인들이 불교를 선호하고 승려들을 존중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중국으로 간 동남아 여러 나라의 사절단들은 상아로 만든 탑이나 불상, 때로는 사리를 진주, 각종 구슬, 코뿔소 뿔, 설탕, 향과 함께 가져갔다. 자신들이 실제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상관없다. 물론 배로 갔기 때문에 중국 남부의 항구에 들어가 짐을 부리게 허가해달라고 중앙정부에 올린 표문에도 황제의 은덕을 부처의 광명에 비유해 칭송하며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복한다’는 인사치레를 빼먹지 않았다. 절절한 그 문장을 보면 누구라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뛰어난 수완이다. 낯선 곳의 빗장을 푸는 법, 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법을 일찍부터 깨쳤다고나 할까.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소장

중국 남조 양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공작 깃털, 6세기 초. 강희정 제공
중국 남조 양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공작 깃털, 6세기 초. 강희정 제공

고대 힌두교의 신 중 하나인 하리하라, 7세기, 캄보디아,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강희정 제공
고대 힌두교의 신 중 하나인 하리하라, 7세기, 캄보디아,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강희정 제공

▶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아시아 지역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40년간 지역연구에 매진해왔다. 동남아시아의 경제·사회·문화적 중요성이 커진 신남방 시대, 연구소는 그동안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두어 멀지만 가까운 이웃 동남아의 다양한 면모를 전한다. 랜선 여행을 하듯이 흥미롭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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