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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죽기 직전까지 일하기 싫다” 128만명 들고일어난 프랑스

등록 2023-03-08 12:00수정 2023-03-09 08:28

[현장] ‘정년 연장’ 연금개혁안 반대 집회
7일(현지시각) 파리 도심에서 열린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 현장. 시위대가 정부 연금 개혁안을 발표한 엘리자베스 보른 프랑스 총리를 희화화하는 선전물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파리/ 노지원 특파원
7일(현지시각) 파리 도심에서 열린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 현장. 시위대가 정부 연금 개혁안을 발표한 엘리자베스 보른 프랑스 총리를 희화화하는 선전물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파리/ 노지원 특파원

파리 시민 그레고리 바두알(35)은 7일(현지시각) 일터로 향하는 대신 거리로 나왔다. 고등학교 교사인 그는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는 10대 학생을 가르치기에 적합하지 않다. 아이들한테도, 교사들한테도 좋지 않다. (연금을 지급할) 재정이 부족하면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세금을 더 거두면 될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수도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전역 약 280곳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파업 및 시위가 열렸다. 노동자들은 평일인 이날 오후 일터 대신 거리로 쏟아졌다. 프랑스 내무부 추산 128만명, 주최 측인 노동조합 추산 350만명이다.

마크롱 정부는 현행 62살인 정년을 2030년까지 64살로 늦추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연금 개혁안을 지난 1월 10일 발표했다. 이를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지난 1월19일 100만명 넘게 모인 첫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이후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1월 31일 2차 시위에 내무부 추산으로 127만명(노조 추산 280만명)이 몰린 뒤 시위 참가 인원이 줄어드는 추세였지만, 이날 시위에 다시 최다 인원이 몰렸다. 이날 시위 구호는 “함께 프랑스를 멈춰 세우자”다.

이날 노조의 6차 전국 파업으로 열차 운행이 대부분 중단되고 정유 공장이 문을 닫았으며 전력 생산이 줄었다. 초고속열차(TGV)는 5대 가운데 1대 정도만 운행됐고, 인근 국가로 가는 열차 상당수가 취소됐다. 이튿날인 8일에도 수도권 버스와 지하철이 축소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파업으로 파리 샤를 드골과 오를리, 마르세유 등 공항의 항공편이 20∼30%가량 취소됐다. 파업을 주도한 프랑스 8개 노동조합 단체들은 파업이 이번주 금요일까지 길어질 수 있다고 압박하고 나섰다.

프랑스 파리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그레고리 바두알(35)과 그의 가족. 바두알 가족은 7일(현지시각) 파리 도심에서 열린 정부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손팻말을 만들어 나왔다. 파리/ 노지원 특파원
프랑스 파리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그레고리 바두알(35)과 그의 가족. 바두알 가족은 7일(현지시각) 파리 도심에서 열린 정부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손팻말을 만들어 나왔다. 파리/ 노지원 특파원

바두알은 함께 고교 교사로 일하는 배우자, 그리고 여섯살 아들과 함께 시위에 나왔다. 23살에 학교를 마치고 현장에 투입된 교사가 연금을 100% 받으려면 현재는 42년 동안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의 연금 개혁안이 도입되면 근속해야 할 기간이 1년 더 늘어나 66살에도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람을 느끼지만 바두알은 60대 중반은 “‘좋은 교사’가 되기엔 많이 지쳐있는 나이”라고 말했다.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파리 시민 앤(60)이 7일(현지시각) 파리 도심에서 열린 시위 현장에서 <한겨레> 취재진에게 은퇴 연령을 64살로 늘리는 정부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내용의 포스터를 보여주고 있다. 파리/ 노지원 특파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파리 시민 앤(60)이 7일(현지시각) 파리 도심에서 열린 시위 현장에서 <한겨레> 취재진에게 은퇴 연령을 64살로 늘리는 정부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내용의 포스터를 보여주고 있다. 파리/ 노지원 특파원

간호사 앤(60)도 바두알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좋은 간호사로 일하기에 난 지금 너무 피곤하다. 그런데 정부가 정년을 64살로 늘린다고 한다. 정말 너무한다. 이제 그만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앤은 앞서 있었던 전국 연금 개혁 반대 시위에 모두 참여했다. 앞으로 2년8개월만 더 일하면 연금을 다 탈 수 있지만 그는 이미 “너무 지쳐있다”고 말했다.

전국 규모 시위가 예정된 이날 아침부터 파리 지역 집결지인 세브흐 바빌론 역 교차로는 경찰과 일반 시민 차량이 뒤섞여 체증을 빚었다. 시위 시작 3시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시민들은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본격적으로 행진을 위한 대열에 합류했다. 오후 2시 행진이 시작되자 거리는 인파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보이지 않았다.

시위를 주도한 프랑스의 8개 노조 단체는 물론 대학생, 여성주의, 환경 등 각종 단체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구름 낀 회색빛 하늘에는 수십개 단체의 깃발이 형형색색으로 펄럭였다. 기온은 9도 안팎으로 쌀쌀했지만 거리를 가득 채운 시민의 호흡과 외침으로 훈기가 돌았다. 정부의 개혁안을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필사적인 시위이지만 거리는 마치 ‘축제’의 현장 같았다. 거리 곳곳에 시위 참가자의 허기를 채워줄 푸드트럭이 김을 내뿜었고, 시위 참가자들 상당수는 이동식 앰프에서 나오는 노래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대학생 단체 대열에서 만난 건축학도 로만느(22)는 “나 스스로는 물론, 선생님들을 위해” 시위에 나왔다고 했다. 파리 건축 전문대에 다니는 그는 아직 본격적으로 노동 시장에 뛰어들기 전이지만 정부의 연금 개혁안에 “결사반대”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겠지만, 65살까지, 또는 죽기 직전까지 일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로만느는 건축이라는 분야가 스트레스가 큰 분야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은퇴를 늦추기보다는 “빨리 편안한 삶을 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은퇴 연령이 “직업에 따라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사무직의 경우 60살 이상까지도 일할 수 있겠지만 육체 노동자는 60살 넘어서까지 일하기 힘들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몸으로 일을 하면서 50대에 이미 지쳐버렸을 수 있죠. 그런데 현재 정부의 개혁안은 그 선택지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닌가요? 아주 지쳤는데도 연금을 받으려 더 일하게 만드니까요.”

로만느는 정부가 연금 개혁 추진 이유로 드는 ‘재정 부족’도 변명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마크롱 대통령이 2018년 세 부담으로 인한 고액 자산가, 기업의 경제활동 위축 등을 우려해 ‘부유세’를 사실상 폐지한 사실을 언급하며 “대기업 세금을 깎느라 정부 재정이 줄어든 걸 왜 연금 개혁으로 대응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동 건강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파리 시민 오랭(28)이 7일(현지시각) 파리 도심에서 열린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파리/ 노지원 특파원
아동 건강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파리 시민 오랭(28)이 7일(현지시각) 파리 도심에서 열린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파리/ 노지원 특파원

이날 시위에 참여한 페미니즘 단체 속에서 행진하던 오랭(28)은 연금 개혁안 대신 ‘여성의 임금을 올리자’라고 주장했다. 현재 프랑스에서 여성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남성에 비해 20%가량 낮은데, 여성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면 세수가 늘어 연금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여성주의 단체의 일원으로서 이번 시위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연금 개혁안의 첫번째 피해자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 밤낮으로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고, 그다음 피해자는 여성”이라며 “노동자가 처한 업무 환경의 질, 임금 인상은 놔두고 은퇴 연령을 높이는 것은 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프랑스 전역에서 열린 시위는 대체로 평화롭게 끝났지만 파리와 리옹, 낭트 등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최루가스를 뿌리고 물대포를 쏘기도 했다. 특히 가장 많은 참가자가 모인 파리에서는 건물, 자동차 등을 훼손한 등의 혐의 등으로 43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7차 시위는 사흘 뒤인 11일에 열린다.

파리/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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