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 채권단의 ‘긴축’ 요구에 대한 그리스의 찬반 국민투표에서 ‘반대’ 결과가 나온 5일 밤(현지시각) 아테네의 의회 앞에 모인 ‘반대론’ 지지 시민들 중 한 여성이 그리스 국기를 흔들며 자축하고 있다. 아테네/AP 연합뉴스
개표 결과 소식에 ‘축제의 장’ 변모
그리스 국기 휘감고 반나치 노래
“우리 책임 있지만 EU 책임도 커
일자리 없는 청년들 정서 완강”
그리스 국기 휘감고 반나치 노래
“우리 책임 있지만 EU 책임도 커
일자리 없는 청년들 정서 완강”
5일 저녁 7시(현지시각) 국민투표가 끝나기도 전부터 사람들은 아테네 중심가 신타그마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헌법’이라는 뜻의 이 광장은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긴축과 연금 삭감 등을 요구하는 채권단의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선언한 뒤 ‘반대’(OXI·오히) 표를 찍자는 쪽의 집회장소가 되어 왔다. ‘반대’가 승리할 것이란 개표 결과가 전해지면서, 한밤의 신타그마 광장은 축제의 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광장 한 켠에서는 얼싸안고 ‘벨라 차오’(안녕, 내 사랑)를 부르는 이들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나치즘과 파시즘에 저항했던 게릴라(파르티잔)들의 노래로, 유럽과 남미의 좌파들이 즐겨부르는 저항가요다. 대학생 모하메드(21)는 친구 3명과 함께 광장에 나와 환호했다. 그는 “그리스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의 돌파구를 찾을 결정적 시점이다. 이제는 대안과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다”며 “지금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유럽연합 특히 독일이 원하는 모든 것에 ‘예스’라고 하면서 끌려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에는 일자리가 없어 나처럼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직장을 구하려면 다른 나라로 가야 했다”는 고민을 털어놓으며 변화를 기대했다.
자정을 넘으면서 광장의 열기는 환호로 더욱 뜨거워졌다. 사람들은 그리스 국기를 몸에 휘두르고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부부가 함께 광장에 나온 공무원 출신의 연금생활자 엘렉트라(63)는 “너무 행복한 하루”라고 말했다. 그는 “투표를 앞두고 노골적으로 ‘찬성’(NAI·네) 쪽을 지원하면서 투표 결과가 박빙일 것이라고 보도한 미디어들 때문에 마음을 졸였는데, 모든 지역에서 승리해 기쁘다”며 “지난 5년 동안 더 나빠진 삶의 질을 생각하면 도저히 채권단의 협상안에 찬성하는 쪽에 표를 던질 수 없었다”고 했다. 재벌(올리가르흐)들이 장악한 그리스 언론이 석유와 약품이 떨어져 가고 있다고 불안감을 부추기고 연금 생활자들의 어려움을 강조하며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 연장 협상안에 대한 ‘찬성’을 유도했는데도, 이를 이겨냈다는 얘기다. 그는 “파트타임 등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가까스로 살아남기 위해 생존투쟁을 벌이는 내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다. 그리스가 이렇게 비참해진 데는 우리 탓도 있겠지만 유럽연합의 책임도 크다. 오늘 투표 결과가 비정상적인 현재를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그리스인들이 채권단의 추가 긴축 요구에 반대 표를 던진 까닭은 각자 다르겠지만 이들의 말들 속에 한 가지 이유는 분명해 보였다. ‘이제는 더이상 견딜 수 없다.’ 지난 5년 동안의 긴축정책 등으로 삶은 피폐해졌는데 이런 정책을 계속하겠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다. 특히, 일자리가 없는 젊은층들 사이에서 이런 정서는 강하게 느껴졌다. 이런 분노가 유로존에서 이탈했을 때 겪게될 경제적 불안과 공포를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 채권단은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반대’는 곧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그렉시트)를 뜻한다고 위협하고,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붙인 치프라스 정부와는 신뢰가 깨져 더 이상 협상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 왔었다. 이런 채권자들을 향해 ‘오히’라고 외치는 것은 ‘국가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 치프라스 총리의 주장이 그리스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처럼 보인다.
치프라스 총리는 5일 늦은 밤 텔레비전 연설에서 “그리스인들은 연대와 민주의 유럽을 위해 투표를 했다”며 “내일 그리스는 곧바로 협상장으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는 그리스의 금융 안정을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선거 결과가 유럽과의 결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채권단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를 일이다.
찬성표를 던졌다는 스테파노스(35)는 “반대 표를 던진 이들은 더이상 긴축은 견딜 수 없다며 어떤 후폭풍을 겪을지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찬성 표를 던진 사람들은 포퓰리즘 정치 때문에 나라가 더 힘들어질까 우려한다”고 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40대 남성은 “난 ‘오히’와 ‘네’ 양쪽에 모두 투표해 무효표로 만들었다. 현 집권 세력은 말은 화려하지만 능력을 못믿겠고, 이전의 부패세력들에게 다시 기회가 돌아가는 것에도 반대한다”며 “치프라스 총리가 그와 마주앉고 싶지 않다는 채권단을 돌려세울 능력이 있는지, 그리스와 채권단을 비유하면 한쪽은 소형차고 다른 한쪽은 초대형 트럭인데 결과가 자명하지 않겠느냐”고 비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민투표라는 한 고비를 넘은 그리스인들 앞에는 채권단과의 협상, 그리고 협상 결렬시 유로존 이탈 위기 등 가파른 고비들이 버티고 있다.
아테네/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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