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은 ‘국제 이주자의 날’이었다. 유엔은 2000년 총회에서, 10년 전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 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이 의결된 날인 12월18일을 ‘국제 이주자의 날’로 제정해 기념한다. 올해로 15번째를 맞은 국제 이주자의 날에는 지구촌을 하나로 묶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올 한 해 동안 새 삶을 찾아 고국을 떠났다가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이주자와 난민들을 추모하는 촛불의식이었다.
2015년 EU는 내우외환의 해
연초 그리스 구제금융 위기 넘자
러시아의 안보 위협과 IS 테러
난민 따른 자국민간 갈등도 겪어
메르켈 결단으로 ‘빗장’ 열었지만
입국 통로 이탈리아·그리스와 대립
‘수용 반대’ 극우세력과 곳곳 마찰
내전 끝나지 않는 한 위기는 진행형
■ 최악의 난민 사태
올해 국제뉴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낱말 중 하나가 ‘난민’이다. 특히, 유럽은 한 해 내내 폭증하는 난민의 유입으로 몸살을 앓았다. 지난 22일 유엔난민기구(UNHCR)와 국제이주기구(IOM)는 올해 유럽에 들어온 난민이 100만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하루 평균 2740명이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밀려왔다. ‘유럽 난민 위기’라는 표현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난민.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2015년은 유럽연합(EU)에 내우외환의 해였다. 연초부터 그리스 구제금융 사태가 유럽 통합의 경제적 토대인 유로존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시험대에 올렸다.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과 함께 최대 채권국인 독일은 아슬아슬한 ‘치킨게임’을 불사하며 그리스의 급진좌파 정부를 몰아붙인 끝에 ‘가혹한 긴축’ 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위기를 넘기자마자 시리아 난민 위기가 긴급 현안으로 떠올랐다. 난민 홍수에 따른 역내 갈등, 중동을 비롯한 분쟁지역의 무력충돌이 낳은 유럽 대도시들에서의 테러, 러시아의 군사적 팽창과 안보 위협, 유로화 약세,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압박에 따른 유럽연합의 균열 등 숨 돌릴 새 없이 메가톤급 위기가 이어졌다.
그중에도 올해 유럽연합의 모든 회원국이 공동으로 겪은 최대 도전이 바로 난민 문제였다. 유럽 유입 난민의 절대다수인 97만2500명은 지중해와 에게해를 건넜다. 또 3만4000명은 터키에서 육로로 불가리아와 그리스로 국경을 넘었다. 난민을 국적별로 보면, 시리아 출신이 절반을 차지해 가장 많았고, 아프가니스탄 출신이 20%, 이라크 출신이 7%로, 3개국 난민이 전체의 4분의 3을 넘었다. 대다수는 내전의 와중에서 종교, 핏줄, 정파 차이에 따른 목숨의 위협과 박해, 가난을 피해 살길을 찾으려던 사람들이었다.
거칠고 위험한 이주길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목숨을 잃는다. 국제이주기구가 지난 19일 발표한 최신 집계를 보면, 올해 들어서만 지난 19일까지 이주길에서 숨진 사람은 5162명에 이른다. 그중 3692명(71.5%)이 지중해에서 유럽으로 향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다음은 미얀마의 이슬람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이 대부분인 동남아시아 난민(736명)과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의 밀입국자(244명), 유럽 육로 밀입국자(139명)가 뒤를 이었다.
■ 유럽 난민 위기, 왜?
그렇다면 올해 유럽이 유난히 난민 위기에 부닥친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시리아 내전이다. 5년 가까이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으로 지금까지 적어도 25만명이 숨졌고, 440만명의 국외 난민을 포함해 모두 1100만명의 강제이주자가 생겼다. 요르단, 레바논, 터키 등 인접국에서 포화 상태에 이른 난민들은 유럽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둘째, 유럽행 밀입국이 쉬워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가장 선호된 유럽 밀입국 경로는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의 최남단 람페두사섬에 가닿는 바닷길이었다. 그러나 올해 급증한 시리아 난민은 인접국 터키의 서쪽 땅에서 그리스 레스보스섬까지 최단거리가 10㎞도 안 되는 해상경로를 이용했다. 또 지난 8월에는 독일이 모든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전격 발표한 뒤 육로 이동이 크게 늘었다.
셋째, 유럽으로 가는 비용도 그전까지의 다른 경로보다 훨씬 싸졌다. 터키-그리스 바닷길이 크게 단축되고, 밀입국 수단으로 간단하지만 위험한 고무보트가 주종이 되면서 밀입국 비용이 크게 줄었다. 리비아-이탈리아 밀입국 항로는 상대적으로 큰 배를 타야 했고 브로커 비용도 1인당 6000달러 수준이었지만, 터키-그리스 해협의 밀입국 비용은 그 절반에도 못 미쳤다.
넷째, 독일의 우호적인 난민 수용 정책이다. 지난 8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시리아 출신 난민을 기존의 유럽연합 난민 법규와 상관없이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유럽연합이 시리아 난민 분산수용도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인도주의적 조처는 시리아 출신이 아닌 난민이나 단순한 경제적 이주자들까지 뒤섞여 유럽으로 밀려오는 부작용을 낳았다.
다섯째, 시리아 정부의 징병몰이다. 세습권력으로 소수 시아파 독재정치를 해온 바샤르 아사드 정권은 반군에 맞서 싸울 병력이 부족해지자 지난해 말부터는 최근 10년 안에 병역의무를 마친 모든 예비역과 30살 이하 남성들을 강제 징병하기 시작했다. 이는 폭압적인 정부의 병역을 피하려는 남성과 그 가족들의 난민 행렬 합류로 이어졌다.
여섯째, 시리아 정부의 무더기 여권 발급 정책이다. 시리아 정부는 지난 4월 여권 없이 시리아를 탈출한 자국 난민들에게 외국 주재 대사관에서 새 여권을 발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리아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유럽이 시리아 난민 분산수용에 합의한 뒤로 시리아 여권은 합법적인 유럽행 보증수표가 됐고, 위조 시리아 여권까지 나돌며 이주자들의 유럽행을 부추겼다.
■ 시리아 내전이 최대 변수
유럽연합이 올해 시리아 난민에게 부분적이나마 빗장을 푼 것은 메르켈 총리의 정책적 결단에 힘입은 바 컸다. 메르켈 총리의 ‘시리아 난민 수용’ 결정은 1990년 제정된 이후 유럽연합 난민 수용 정책의 근간이던 더블린 조약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조처였다. 더블린 조약은 난민의 경우 그들이 처음 발을 들여놓은 유럽연합 회원국이 그들을 수용하고 보호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유럽 밀입국을 시도하는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난민의 대다수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탈리아와 그리스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이 두 나라와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 간에 갈등이 커져왔다. 메르켈 총리가 관철한 ‘유럽연합 회원국의 시리아 난민 분산수용’은 그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분산수용의 규모와 실행을 놓고 갈등이 불거졌다.
독일은 올해에만 100만명이 넘는 난민을 받아들였지만 한없이 밀려오는 난민 물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이주자 수용에 반대하는 극우 세력이 급부상했다. 메르켈 총리는 결국 지난 14일 독일 공영방송 <아에르데>(ARD)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우려를 받아들인다. 독일에 들어오는 이주자 수를 과감히 줄이기를 원한다”고 한발 물러섰다. 난민 포용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과 타협을 모색한 것이다.
겨울철이 되면서 난민 유입은 다소 주춤해진 모양새다. 그러나 시리아에 내전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 한 난민은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유럽은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시리아 내전의 해법을 두고 유럽과 러시아, 터키와 주변 아랍국은 서로 동상이몽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시리아 난민들한테 유럽의 문턱이 새해부터는 다시 높아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