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22일 모스크바 시내 러시아 정교회 사원인 '구세주 성당'에서 열린 안드레이 카를로프 터키 주재 러시아 대사의 장례식에 참석해 고인을 바라보고 있다. 카를포프 대사는 지난 19일 터키 앙카라에서 터키의 전직 경찰관에게 피살됐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지난 19일 터키에서 러시아 대사가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양국 관계를 악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반서방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대사 피살 사건에도 두 나라는 오히려 입이라도 맞춘 듯 ‘테러리즘’을 비난하며 더욱 밀착하는 움직임을 보여, 국제사회가 그 배경과 양국 관계의 향방에 주목하고 있다.
러시아는 자국 대사의 피살에도 터키 정부를 비난하거나 항의하는 목소리를 한 차례도 내지 않았다. 대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건 직후 “(이번 사건은) 국가간 관계를 분열시키려는 도발 행위이자, 시리아의 평화를 해치려는 것”이라며 테러리즘에 화살을 돌렸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도 “러시아와 터키의 관계를 해치려는 비열한 도발 행위”라고 비난하며,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 가능성을 미리 차단했다.
러시아와 터키의 최대 공통 관심사는 시리아 내전이다. 영국 <가디언>은 21일 “러시아가 (이번 사건에) 자제심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며 “시리아 알레포의 함락으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파워 게임의 중심에 서게 됐고, 자국 대사의 죽음이 아무리 비극적이더라도 푸틴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리아 내전에서 러시아가 지원한 바샤르 아사드 정부군이 최근 반군의 거점인 알레포를 탈환하자, 러시아는 반군을 지원한 미국 등 서방을 배제하고 시리아 사태 해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중동 진출의 교두보인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터키와의 협력이 절대적이다. 터키는 서방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지만, 인권 문제와 미국에 망명 중인 반체제 인사인 펫훌라흐 귈렌의 송환 문제 등을 놓고 서방과 갈등이 커져왔다. 러시아는 그 빈틈을 노리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앙카라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시리아에서 탈출한 소녀 바나 알라베드(7)를 포옹하고 있다. 바나는 시리아 내전의 격전지인 고향 알레포의 참혹하고도 두려운 상황을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알려왔다. 앙카라/AP 연합뉴스
터키 역시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나쁠 이유가 없다. 에르도안 정부는 이번 러시아 대사 사건을 반체제 세력 견제와 권력 강화에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1일 “러시아 대사 살해범이 ‘페토’(FETO)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할 이유가 없다”며, 사건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정적인 귈렌을 언급했다. ‘페토’는 ‘펫훌라흐 귈렌 테러 조직’의 영문 약어로, 에르도안 정부가 귈렌 지지 세력을 싸잡아 일컫는 용어다. 에르도안은 지난 7월에 실패로 끝난 군부 쿠데타의 배후에도 미국에 망명 중인 귈렌이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터키의 친정부 성향 신문인 <예니 샤파크>는 러시아 대사 피살 사건 다음날 “터키-러시아 관계를 해치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페토’ 연계 암살자들이 동원되고 있다”며 “미국이 터키에 노골적인 공격을 시작했다”고까지 보도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터키 정부의 ‘귈렌 배후설’에까지 휘말릴 생각은 없는 듯 보인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은 21일 “대사 살해 배후가 누구인지 수사 결과가 확정되기 전에 섣부른 결론을 내려선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과의 관계 등을 의식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와 터키 양국이 시리아 내전과 대테러전이라는 명분 위에서 각기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형국이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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