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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제2 유라시아 제국’ 꿈꾸는 러시아의 푸틴

등록 2017-01-05 17:58수정 2017-01-05 21:12

지지율 89% ‘21세기 차르’ 절대권력
나토 포위·경제 제재 뚫고 세력 키워
숨죽였던 20여년 딛고 기지개 활짝

터키 손잡고 시리아 내전 탈출구 주도
중국과 군사·경제 협력…미·일 견제
트럼프 친러·EU 약화 틈탄 제국의 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4년 5월 크림 반도의 항구도시 세바스토폴을 방문해 연설하고 있다. 앞서 그해 3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자치령이던 크림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이 주민투표로 러시아와의 합병을 결의한 것을 근거로 두 지역을 전격 합병해 러시아의 역외 영토로 선포했다. 그 직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계 주민들의 분리독립 투쟁으로 일어난 우크라이나 내전에도 개입했다. 세바스토폴/AF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4년 5월 크림 반도의 항구도시 세바스토폴을 방문해 연설하고 있다. 앞서 그해 3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자치령이던 크림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이 주민투표로 러시아와의 합병을 결의한 것을 근거로 두 지역을 전격 합병해 러시아의 역외 영토로 선포했다. 그 직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계 주민들의 분리독립 투쟁으로 일어난 우크라이나 내전에도 개입했다. 세바스토폴/AFP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미국은 자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 35명과 가족들에게 “72시간 안에 나가라”는 전격 추방령을 내렸다. 러시아 정부 소유 시설 두 곳을 폐쇄하고, 러시아 정보기관과 관련자들에 대한 경제제재도 추가했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컴퓨터 해킹으로 개입한 의혹에 대한 고강도 보복 조처였다.

양국 사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러시아는 ‘맞추방 보복’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허를 찔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30일 크렘린(크레믈)궁 성명을 통해 “우리는 미국 외교관들 누구도 추방하지 않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에서 러-미 관계가 어떻게 진전되는지 지켜보며 향후 조처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한술 더 떠 “러시아 주재 미국 외교관들의 모든 자녀를 크렘린궁 새해맞이 파티에 초청한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 뉴스>는 “31일 미국에서 추방돼 귀국하던 러시아 외교관 35명의 자녀들도 특별기 안에서 푸틴의 초청장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트위터 메시지로 “(푸틴의) 유보 결정은 대단하다. 나는 그가 매우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거들었다. 푸틴은 ‘현명하고 넉넉한 세계 지도자’ 이미지를 한껏 과시했고, 미국은 뜻밖에 ‘의문의 1패’를 맛봤다.

푸틴이 통치하는 러시아의 전방위 행보가 거침없다. 지난해 푸틴은 최고의 한 해를 누렸다.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바샤르 아사드 정부를 지원한 열매는 크고 달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사적 주축국인 터키가 시리아 반군을 지원해 러시아와 터키는 시리아 내전에서 대립구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공동의 명분을 내세워 터키와의 밀월 관계 구축에 성공했다. 러시아는 이를 기반으로 미국과 친서방 아랍국가들을 따돌린 채 터키·이란과 함께 시리아 내전 휴전협정을 주도하면서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키웠다. 기존에 러시아의 해군 보급기지로 활용해왔던 시리아 항구도시인 타르투스를 역외 상설 군항으로 승격하는 협정을 비준해 지중해권 작전 교두보도 확보했다.

중동 외에도 러시아는 발트해 3국을 포함한 북유럽에서 공중·해상 군사훈련으로 서방의 군사동맹을 시험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지난해 중국과도 두 차례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해 공조를 과시하며 서방과 일본을 견제했다. 유럽이 최근 몇년째 난민 위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배타적 포퓰리즘 확산 등으로 흔들리는 것도 러시아에는 유리한 환경이다.

앞서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전에 개입해 크림 반도를 전격 합병한 뒤 이어진 서방의 경제제재와 국제유가 폭락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도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다.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은 최근 러시아 중앙은행과 재무부 등을 인용해 “러시아 경제가 2016년 어려운 환경에도 잘 적응해 왔으며, 올해 경제성장률은 1.0~1.2%로 전망된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5월에는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뒤, 러시아가 추진중인 유라시아경제연합(EEC) 프로젝트와 중국의 실크로드 경제권 구상인 ‘일대일로’ 구상에 서로 협력하는 데 합의했다.

2014년 11월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맨 왼쪽)이 브릭스(BRICS) 5개국 정상들인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왼쪽 둘째부터),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제이컵 주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있다. 브리즈번/ 러시아 대통령실 홈페이지 갈무리
2014년 11월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맨 왼쪽)이 브릭스(BRICS) 5개국 정상들인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왼쪽 둘째부터),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제이컵 주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있다. 브리즈번/ 러시아 대통령실 홈페이지 갈무리
이런 국내외 성과에 힘입어, 푸틴은 국내에서도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다. 러시아의 민간 여론조사업체 ‘레바다’가 지난달 발표한 푸틴의 지지율은 89%에 이른다. 푸틴은 4연임 도전이 확실시되는 2018년 대선(임기 6년)에서 당선될 경우 2024년까지 내리 4반세기 동안 러시아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게 된다. 푸틴은 지난달 31일 전국에 방영된 신년 연설에서 “우리는 성공적으로 일하고 있으며 많은 것을 이뤘다”고 자평하며 “승리와 성취, 이해와 신뢰, 조국에 대한 진실한 염려에 대해 여러분(러시아 국민)에게 감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팽창 전략이 새로운 건 아니다. 북유럽 평원을 향한 눈길과 부동항에 대한 욕망은 역사적 뿌리가 깊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러시아 혁명 성공 이후 70여년을 지속한 소비에트연방 시절은 그 갈증을 채워준 시기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1990년대 소련 붕괴와 나토의 급팽창, 미국의 단일 초강대국 시대와 중국의 급부상을 지켜보며 20여년간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다 ‘21세기 차르’라는 별명을 얻은 절대 권력자 푸틴의 등장으로 다시 기지개를 펴는 형국이다.

러시아 군대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행진하고 있다. 모스크바/러시아 대통령실 홈페이지 갈무리
러시아 군대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행진하고 있다. 모스크바/러시아 대통령실 홈페이지 갈무리
제2의 유라시아 제국을 꿈꾸는 러시아의 향방은 푸틴의 발언과 정책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푸틴은 두번째 대통령 임기 초기였던 2005년 4월 의회 연설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악의 지정학적 재앙이다.” 그는 “1991년 소련 붕괴는 수천만명의 러시아 국민이 러시아 연방의 바깥으로 밀려난 극적인 사건이었다”며 “현대 세계에서 러시아의 자리는 우리가 얼마나 성공적이고 강하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20세기 중반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의 말을 연상시킨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직후인 1939년 10월 <비비시>(BBC) 방송 연설에서 “러시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 러시아는 ‘불가사의’라는 내용물을 ‘미스테리’라는 포장지로 감싼 ‘수수께끼’다. 하지만 열쇠가 없는 건 아니다. 바로 러시아의 국익이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소련)는 이후 연합국으로 참전해 2차대전 승전국 명단에 올랐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3월, 처칠은 또 이렇게 말했다. “확신하건대, 강인함만큼 러시아인들이 경외하는 것은 없으며, 나약함만큼 그들이 경시하는 것은 없다. 특히 군사적 나약함이 그렇다.” 냉전시대를 예고하며 소련을 “철의 장막”에 빗댄 그 연설이었다.

러시아의 수수께끼와 열쇠는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그러나 러시아가 애국심 마케팅과 군사력만 내세워 세력을 확대하기엔 힘에 부친다는 지적도 많다. 푸틴이 서방의 경제제재 해제와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에 목말라 하는 이유다. 미국 공영방송 <엔피아르>(NPR)의 모스크바 특파원은 최근 대담 프로그램에서 “러시아는 민족과 종교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나라인데다, 1991년 제국을 잃은 트라우마가 여러 방면에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들을 빚어내며 영향을 끼친다”고 설명했다.

<워싱턴 포스트>도 지난해 마지막날 기사에서 “푸틴에게 2016년은 승리의 해였지만 러시아가 슈퍼파워가 되기엔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옛소련이 아니고, 지금이 냉전 시기도 아니며, 모스크바가 ‘세계 패권’을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신문은 “푸틴의 목표는 미국의 영향력 감소와 러시아의 사활적 이익 확대에 한정돼 있다”며 “푸틴이 추진할 수 있는 힘은 취약한 (러시아) 경제와 미국에 견줘 미미한 세력권 탓에 제한적이다”고 짚었다.

이고리 호바예프 주필리핀 러시아 대사(회견석 왼쪽)가 4일 마닐라항에 입항 중인 러시아 해군 대잠 초계함 애드미럴 트리부츠호 함상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호바예프 대사는 이날 회견에서 필리핀에 신형 첨단무기를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며 합동군사훈련을 제안했다. 마닐라/AP 연합뉴스
이고리 호바예프 주필리핀 러시아 대사(회견석 왼쪽)가 4일 마닐라항에 입항 중인 러시아 해군 대잠 초계함 애드미럴 트리부츠호 함상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호바예프 대사는 이날 회견에서 필리핀에 신형 첨단무기를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며 합동군사훈련을 제안했다. 마닐라/AP 연합뉴스
앞으로 몇년간, 푸틴이 이끄는 러시아의 행보는 러시아 국내경제 상황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이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 줄곧 ‘러브 콜’을 보내는 트럼프 정부와의 관계가 유지될 경우 푸틴과 러시아의 입지는 더 탄탄해질 게 분명하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는 푸틴에게 ‘양날의 칼’이다. 미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의 스티븐 크로울리는 지난주 <뉴스위크> 기고에서 “트럼프가 자신의 말에 충실하다면 미-러 관계는 따뜻해질 것”이라며 “공화당 의원들을 포함해 의회가 미-러 해빙에 거세게 문제 제기를 하겠지만, 결국은 행정부가 외교정책을 이끈다”고 말했다. 그 경우 푸틴은 안보 부담을 덜고 경제제재 해제도 기대할 수 있다. 크로울리는 그러나 “러시아가 더 이상 미국의 ‘제1 적국’이 아니라면, 푸틴은 러시아의 경제난을 탓할 대상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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