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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카미유 클로델, 로댕 사후 100주년에 눈부신 부활

등록 2017-02-27 16:07수정 2017-02-27 21:12

프랑스, 국립미술관 헌정해 다음달 개관
클로델이 파괴 못한 90여점중 절반 전시
자연주의와 표현주의 넘나든 독창적 재능

19살때 24살 연상 로댕 만나 모델·연인
천재성 불구 불화와 사회적 편견 끝 결별
조현병 얻어 정신병원에서 30년 쓸쓸한 삶
카미유 클로댈이 로댕을 처음 만난 19살 당시의 사진. 위키피디아
카미유 클로댈이 로댕을 처음 만난 19살 당시의 사진. 위키피디아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연인이자 비운의 여성 조각가였던 카미유 클로델(1864~1943)이 한 세기 만에 최고의 예술가로 공식 인정을 받게 됐다.

프랑스 정부가 클로델의 예술세계를 기리며 헌정한 국립 미술관이 다음달 26일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노장쉬르센에서 문을 연다고 영국 <가디언>의 일요판 <옵저버>가 26일 보도했다. 클로델이 어린 시절을 지냈던 도시에 세워지는 이 미술관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뛰어난 재능뿐 아니라 남성 중심적 사회 풍토 속에서 자아실현과 사랑을 함께 추구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개인사를 보여주는 기념비적 공간이 될 전망이다.

클로델은 자신의 작품 상당수를 부숴버린 까닭에 90여점의 작품만 전해오고 있다. 이번 개관에는 우선 그 중 절반 정도가 전시된다. 특히, 올해는 로댕의 타계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전역에서 로댕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어, 로댕의 그림자에 갇혔던 클로델의 재평가는 더욱 의미가 깊다. 클로델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셰실 베르트랑은 <옵저버>에 “클로델은 활동 시기는 짧지만 자연주의에서 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발전을 성취한 매우 중요한 예술가”라고 말했다. 클로델은 우리나라에선 이자벨 아자니가 주인공으로 열연한 영화 <까미유 끌로델>(1988)을 통해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졌다.

카미유 클로댈의 청동조각상 ‘왈츠’(1893년작). 위키피디아
카미유 클로댈의 청동조각상 ‘왈츠’(1893년작). 위키피디아
클로델은 어질적부터 찰흙 조각을 하며 놀았고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클로델이 15살이 되자 당시 조각가 알프레 부셰에게 조각의 기초를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이듬해, 부셰는 제자를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시키려 타진했으나, 당시만 해도 여성에게 국립미술학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클로델은 17살 때인 1881년 당시로선 드물게 여성의 입학이 허용됐던 파리의 사립학교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조각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클로델이 파리에서 로댕을 만난 것은 운명적이었다. 클로뎅의 후견인이었던 부세가 로댕에게 그의 지도를 부탁한 것이다. 클로델의 나이 19살, 로댕은 43살의 중년 남성이자 이미 미술계의 유명 작가였다. 게다가 로댕은 20년째 동거중이던 로즈 뵈레라는 여성과의 사이에 아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클로델이 로댕의 작업실에서 제자 겸 모델로 활동하면서 둘은 24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 연인으로 발전했다.

클로델은 ‘단발머리 카미유 클로델’을 비롯한 로댕의 수많은 초상화와 조각 작품들에서 영감의 원천이 됐다. 같은 시기, 클로델은 ‘로댕 흉상’ 같은 작품에 재능과 사랑을 새겨 넣었다. 로댕이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걸작 ‘지옥의 문’ 중 가장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들에 클로델의 손때가 함께 묻었다.

영화 <카미유 클로델>(1988년)의 한 장면. 프랑스영화진흥기구 누리집 갈무리
영화 <카미유 클로델>(1988년)의 한 장면. 프랑스영화진흥기구 누리집 갈무리
그러나 로댕이 화려한 조명을 받는 동안 클로델은 늘 그 그림자에 가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특히, 둘의 사이를 질투한 로즈 뵈레가 클로델이 로댕의 작품 활동에 관여하지 못하게 견제한 데다, 클로델도 로댕의 우유부단함과 작품활동을 두고 자주 불화를 빚기 시작했다.

극심한 갈등과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던 클로델은 1892년 낙태한 뒤 로댕과 사이를 끝장 내고 독립했다. 로댕과의 결별은 클로델이 작품활동의 자유와 독자적인 예술세계 구축의 계기가 됐지만, 동시에 그가 예술가로서 성공하는데 필요한 조력자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클로델은 1903년 프랑스 작가 살롱에 자신의 작품들을 출품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한 미술 비평가는 클로델을 “자연을 거부한 혁명, 여성 천재”라고 극찬했다.

카미유 클로댈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일하는 모습(1930년 이전 추정). 위키피디아
카미유 클로댈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일하는 모습(1930년 이전 추정). 위키피디아
그러나 클로델을 알아주는 이들은 소수였고, 그가 프랑스 미술계에서 홀로 설 자리는 극히 좁았다. 특히, 미술계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로댕의 갱’들의 집중적 견제와 험담 속에서 클로델의 영혼은 조금씩 피폐해져갔다. 클로델은 프랑스 정부의 후원을 받는 데 계속 실패하면서 점차 자기 안으로 은둔하기 시작했고, 무력감과 편집증에 시달렸다. 정신질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905년, 클로델은 결국 정신병원의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정식 진단명은 조현병이었다. 사고 체계와 감정 반응의 전반적 장애로 통합적인 정상 사고를 하지 못하는 만성 정신질환이다. 정신질환은 클로델의 삶을 송두리째 유폐시켜 버렸다. 1913년, 자신의 재능을 틔워준 아버지가 타계하자, 가족들이 클로델에겐 그 사실을 알리지도 않은 채 정신병원 입원 수속을 진행했다. 49살 클로델의 삶은 그걸로 끝이었다. 클로델은 이후 꼬박 30년을 정신병원에서 절망 속에 살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쓸쓸히 숨을 거뒀다. 비운의 천재 작가의 주검은 파리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클로델 미술관의 큐레이터 세실 베르트랑은 <옵저버>에 “과거의 여성 예술가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하는 오늘날, 이번 미술관 개관은 클로델의 작품들을 동시대 동료 작가들과 같은 반열에 확고하게 올려놓으면서 그의 독창적인 천재성에 찬사를 바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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