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팀 배로 유럽연합 주재 대사(왼쪽)가 29일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의장에게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친필 서명한 유럽연합 탈퇴 의사 통보 서한을 전달하고 있다. 브뤼셀/신화 연합뉴스
“경애하는 도날트 투스크 의장께. 지난해 6월 영국 국민은 유럽연합(EU) 탈퇴에 투표했습니다. 이 결정은 우리가 유럽인들과 공유하는 가치를 거부하는 것도, 유럽연합에 손해를 입히려는 시도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국은 유럽연합이 성공하고 번영하길 바랍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29일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 정상회의 의장에게 ‘리스본 조약 50조’의 발동을 공식 통보한 6쪽짜리 서한은 꽤 살갑고 애틋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는 “이 편지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브렉시트 이후에도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이웃으로서 우리가 누리기를 희망하는 깊고 특별한 파트너십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라며 “그 목적은 영국뿐 아니라 유럽연합과 더 넓은 세계의 이익”이라고 밝혔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29일 유럽연합에 탈퇴 의사를 공식 통보한 친필 서명 서한. 브뤼셀/EPA 연합뉴스
메이 총리는 이어 “향후 탈퇴 협상에 도움이 될 만한” 7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건설적이며 상호존중의 태도, 영국민의 이익 최우선, 포괄적 협정, 분열의 최소화와 확실성의 최대화, 북아일랜드에 대한 통제권 보장, 자유무역 협상 동시 진행, 유럽연합과의 지속적 협력 등이었다. 길고 힘든 여정이 될 협상에서 유럽연합을 압박하고 유리한 지위를 선점하려는 의도가 짙었다. 편지에는 ‘깊고 특별한 파트너십’(deep and special partnership)이란 표현이 7차례나 들어갔다. 유럽연합에 대한 영국의 복잡하고 절박한 심경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메이 총리는 서한에서 “영국은 경제와 안보 협력에서 ‘포괄적 합의’를 원한다”며 “그러나 그런 합의에 실패하고 떠날 경우 영국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대로 교역할 수밖에 없다”며 유럽 단일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압박했다. 그는 또 “포괄적 합의 실패는 안보 측면에서 범죄 및 테러와의 싸움에 대한 영국의 협력이 줄어들 것임을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브렉시트 협상을 유럽의 집단안보와 연계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앰버 러드 내무장관도 “유로폴(유럽연합 경찰)의 최대 공헌자인 영국이 유로폴을 떠날 경우 범죄 첩보를 (영국) 안에서만 취급하는 게 규정인데, 유럽 회원국들은 우리와 정보 공유를 바란다”고 거들었다. 메이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도 “영국은 유럽연합을 떠난다. 이건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순간”이라며 사뭇 결연한 태도로 의회의 협력을 당부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단상 위)가 ‘브렉시트 협상’ 통보 서한이 유럽연합에 전달된 29일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런던/AFP 연합뉴스
그러나 ‘이혼’ 통보장을 받아든 유럽연합의 반응은 더없이 싸늘했다. 투스크 의장은 “우린 벌써 당신(영국)이 그립다. 감사했다. 잘 가시라”는 짧은 말로 불편한 심기를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유럽연합은 특히 영국이 안보 협력을 협상 카드로 삼는 것을 ‘협박’에 비유하면서까지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유럽의회의 브렉시트 협상 책임자인 기 베르호프스타트 전 벨기에 총리는 “나는 숙녀에게 신사이려 애써왔고, 그래서 ‘협박’이란 단어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며 “유럽인의 안보는 다른 것과 거래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9일 의회 내 집권 기민당 연합 소속 의원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영국이 유럽연합에 전달한 탈퇴 의사 서한에서 요구한 ‘포괄적 합의’를 거부했다. 베를린/AFP 연합뉴스
유럽연합의 수호자가 된 독일도 ‘이혼 먼저, 깊은 대화는 그다음’이라며 영국의 요구에 선을 그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9일 의회 연설에서 “양쪽이 새로운 협정 체결을 맺기 앞서, 영국의 탈퇴 조건이 합의돼야만 미래 관계를 논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고 <도이체 벨레>가 전했다. 유럽연합은 영국이 사람과 재화와 자본의 자유이동을 보장하지 않는 한 영국의 유럽 단일시장 접근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영국의 브렉시트 협상 책임자인 데이비드 데이비스 장관은 30일 현지 민영방송 <아이티브이>(ITV) 인터뷰에서 “영국이 유럽연합에 거액을 지불해온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며, 유럽연합이 이혼 합의금으로 요구하는 600억유로(약 72조원)를 낼 생각이 없음을 거듭 확인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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