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에서 15일 유럽연합 탈퇴 승인투표가 진행되는 가운데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시민이 ‘(유럽연합에서) 떠나는 것은 곧 떠나는 것’이라는 글귀가 쓰인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런던/ 신화 연합뉴스
영국이 칼날 위에 서게 됐다. 영국 의회가 테리사 메이 총리가 주도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협상안을 사상 최대 표차로 부결했다. 야당에서는 즉각 정부 불신임안을 제출해 정국의 파국까지 예상된다.
■
최대 표차 부결
영국 의회는 15일 메이 총리가 제출한 브렉시트 협상안을 230표 차로 부결했다. 이는 영국 의회에서 95년 만에 최대 표차의 현 정부 패배이다. 이날 의회에서는 432명의 의원이 반대했고, 찬성은 202명에 그쳤다.
이로써 영국은 오는 3월29일로 정해진 유럽연합 탈퇴에서 유럽연합과의 아무런 새로운 관계 설정도 없이 내몰리게 될 우려가 커졌다.
일단 메이 정부는 의회의 앞선 의결에 따라, 3일 안에 유럽연합과 다시 협상해 새로운 협상안을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메이 정부가 이 시한 안에 의회를 만족시킬 새로운 협상안을 마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번 브렉시트 협상안에서 최대 쟁점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국경 개방을 보장하는 ‘백스톱’ 조항이었다. 영국이 오는 3월29일 유럽연합을 탈퇴한 뒤 21개월 동안의 과도기를 거치는 동안 유럽연합과 새로운 무역협정을 도출하지 못하더라도, 북아일랜드 국경 개방은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브렉시트 찬성론자 등은 영국의 주권과 통합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격렬히 반발했다.
이날 부결 사태는 브렉시트 강경론자뿐만 아니라 새로운 국민투표 실시를 주장하거나 더욱 온건한 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쪽 모두가 가세하면서 벌어졌다. 메이 총리 정부의 집권 여당인 보수당에서도 118명이 반대에 가세했다.
15일 영국 하원에서 실시된 브렉시트 승인 투표가 부결된 직후 테리사 메이 총리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런던/AFP 연합뉴스
■
메이 총리 정부 운명 불투명
메이 총리 정부의 운명도 바람 앞의 촛불이 됐다.
정부의 중대한 동의안이 이런 표차로 부결되면, 통상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해산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지만 메이 총리는 이날 부결 직후 성명에서 “하원은 말했고, 정부는 경청할 것이다”라고 말해 물러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했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정부 불신임안을 제출해 16일 저녁 7시에 표결에 들어간다. 불신임되면 총선이 실시된다.
불신임안은 일단 17일 저녁 7시에 동의안 상정 투표를 거친 뒤 14일 안에 불신임 본안 투표가 이뤄져야 한다. 만약 이 시한 안에 현 정부나 다른 대안 정부가 신임을 얻지 못하면 총선이 실시된다.
여당인 보수당은 현시점에서 총선을 치르면 노동당으로 정권이 넘어갈 우려가 있어 일단 메이 총리를 지지할 것으로 보인다. 브렉시트를 주도하는 강경파인 보수당 의원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은 총리가 “브뤼셀로 돌아가 북아일랜드 백스톱이 없는 더 좋은 협상안을 협상할 막대한 사명을 받았다”며 정부 불신임안 투표에서 메이 총리를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수당 정권 구성에 중요한 구실을 한 북아일랜드의 신교도 정당인 민주연합당(DUP) 대표 알린 포스터도 자신의 당은 메이 총리를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메이 총리는 자신이 주도한 브렉시트 협상안이 사상 최대의 표차로 부결된 것을 고려하면 그 운명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보수당에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메이 총리 불신임을 통해 제2의 국민투표를 밀어붙일 가능성도 있다.
■
유럽연합, ‘영국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
유럽연합은 당혹과 우려에 빠졌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협상안이 부결돼 무질서한 브렉시트의 위험성이 커졌다고 우려했다. 그는 협상안이 “질서 있는 철수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안이었다”며 자신과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 이사회 상임의장은 영국 의원들을 달래기 위해 이번주 안에 추가적인 명확성을 가진 의지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는 영국이 가능한 한 빨리 그 의도를 명확히 해줄 것을 촉구한다. 시간이 거의 다됐다”고 말해 영국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밝히라고 압박했다.
투스크 의장도 트위터에서 “유일한 긍정적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말할 용기를 최종적으로 가질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영국이 해결책도 없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점을 시사했다.
브렉시트 협상안은 애초 지난해 12월에 의회에서 의결될 예정이었으나, 메이 총리가 부결을 우려해 이날로 늦췄다. 그동안 메이 총리와 유럽연합은 쟁점 사안인 백스톱을 완화하는 대안을 마련했다. 유럽연합 쪽은 백스톱은 적용된다고 해도 “가능한 한 단기간”으로 일시적일 것이라고 보장했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