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가 발효한 지난달 31일, 팀 배로 유럽연합 주재 영국 대사가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사무실을 떠나고 있다. 브뤼셀/AP 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다른 26개 회원국을 뒤로하고 떠나가는 영국에게 한 마지막 공식 발언은 “잘 가셔, 속이 다 시원하군”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발효를 이틀 앞둔 지난달 29일, 벨기에 브뤼셀에선 27개 회원국의 유럽연합 주재 대사들의 정례 주간 미팅이 열렸다. 이날 회의의 의장국인 크로아티아의 이레나 안드라시 대사는 회의가 끝난 뒤 팀 배로 영국 대사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감사하다. 잘 가시라, 속이 다 시원하다(goodbye, and good riddance)”는 ‘조크’로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4일 보도했다. 이 발언은 회의장의 통역자가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을 빠뜨렸다가 이 신문의 보도로 뒤늦게 알려졌다. 영어 낱말 ‘리던스(riddance)’는 ‘제거’, ‘면탈’, ‘귀찮은 것을 쫓아 버림’이란 뜻으로, “굿바이 앤 굿 리던스”는 우리말로 “시원섭섭하다” 정도로 옮길 수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팀 배로 영국 대사가 안드라시 대사의 발언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유럽연합 회원국 외교관들도 영국이 마지막으로 참석한 이날 회의는 좋은 유머가 오간 자리였다고 돌이켰다. 2017년부터 유럽연합에서 영국을 대표했던 팀 배로 대사는 동료 외교관들에게 “함께 둘러앉았던 테이블이 그리울 것”이라며 “(브렉시트 이후에도) 조만간 유럽연합 주재 대사로서 새로운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는 소회를 털어놨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외교관은 ”영국인은 사안의 재미있는 면을 보면서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한다”며 “그러나 이 인사말이 브렉시트 발효 이전에 유럽연합이 영국 대사에게 보낸 마지막 말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레나 안드라시 유럽연합 주재 크로아티아 대사. 브뤼셀/유럽연합
안드라시 대사는 4일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가 나온 뒤 트위터에 팀 배로 대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우리는 우리의 영국 친구들과 나눈 게 하나 더 있다- 유머 감각”이란 글을 달았다. 이레나 대사는 “굿 리던스”란 발언이 “행운을 빈다(good luck)”는 말에 해당하는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이날 유럽연합정상회의 순번 의장국(크로아티아)의 공식 트위터에도 “지난주 회원국 대사들은 팀 배로 영국 대사에게 작별인사를 했으며, 격의 없는 유머가 오고 갔다. 유럽연합 의장국으로서 크로아티아는 (일부 오해의 여지가 있는 발언에) 유감을 표하며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전적으로 존중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안드라시 대사의 ‘불행한 실수’는 영국이 유럽에 남긴 ‘뒤섞인 언어적 유산’을 상징한다”며 “유럽연합에서 영어는 프랑스어와 함께 양대 공식어로 쓰였는데, 다른 언어 사용자들은 종종 영어의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를 놓칠 수 있다”고 짚었다.
이레나 안드라시 유럽연합 주재 크로아티아 대사가 4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팀 배로 영국 대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트위터 갈무리
<유로뉴스>도 4일 이번 해프닝을 보도하면서 “국제 외교가에선 언어 간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외교적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고 짚었다.
2018년 5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방문했을 때 맬컴 턴불 호주 총리의 환대에 영어로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총리의 맛있는(delicious) 부인의 따뜻한 환대에도 감사한다”고 말했다가 민망한 폭소를 자아냈다. 영어 낱말 ‘딜리셔스(delicious)’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델리시우(delicieux)’는 음식을 표현할 때엔 “맛있다”, 사람을 수식할 때엔 “매력적인“,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영어에선 ‘딜리셔스’가 사람을 수식하는 낱말로 쓰이지 않는다.
2018년 12월엔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발표한 크리스마스 메시지의 한 구절이 러시아와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뻔했다. “우리 군이 러시아의 ‘무단침입’에 맞서 영해와 영공 수호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치하했는데, <타스> 통신 등 러시아권의 일부 언론이 ‘무단침입(intrusion)’을 ‘무력침공(invasion)’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러시아가 영국에 강력히 항의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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