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로잔의 크레디트 스위스 지점에 있는 로고. 2021년 4월6일 촬영했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엄격한 고객 비밀유지로 유명한 스위스 은행의 계좌 데이터가 내부고발자에 의해 공개되어, 이들 은행이 어떻게 세계 부호들의 은밀한 자금을 예치하고 이들과 금융거래를 해왔는지 드러났다.
<뉴욕 타임스>는 20일(현지시각) 크레디트 스위스 은행의 내부고발자가 공개한 이 은행의 1만8천개 계좌 자료를 분석한 결과, 1940년부터 2010년대까지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과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두 아들, 파키스탄 정보기관의 최고위 인사 등이 운용했던 비밀스러운 자금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런 내용은 내부고발자가 1만8천개에 달하는 은행 계좌의 데이터를 독일 신문 <쥐트도이체 차이퉁>에 제보했고,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이 자료를 비영리언론조직인 ‘조직범죄와 부패 보도 프로젝트’와 세계 언론기관 46곳과 공유한 뒤 이를 함께 분석했다.
보도 내용을 보면, 이번 공개된 자료는 크레디트 스위스가 세계 최고의 부자뿐 아니라 누구나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에게도 계좌를 열어주고 금융거래를 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전 베네수엘라 에너지 부장관 네르비스 빌라로보스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크레디트 스위스에 계좌를 열어 돈 1000만달러(119억원)를 예치했다. 크레디트 스위스는 2008년 그가 부패와 연루됐다는 외부기관의 보고서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그의 계좌 개설을 허용했다.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두 아들 알라 무바라크와 카말 무바라크도 여섯 개의 계좌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한 계좌에는 1억9600만달러(2343억원)이 들어있었다. 이에 대해 두 아들의 변호사는 돈의 구체적인 내역은 언급하지 않은 채 모두 합법적인 돈이라고 해명했다.
요르단의 압둘라 2세는 모두 6개 계좌를 갖고 있었으며, 그중 하나에는 2억2400만달러(2678억원) 이상이 들어있었다. 요르단 왕실은 이에 대해 “불법적이거나 부적절한 활동과 연관된 돈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파키스탄의 정보기관 책임자인 아크타 압두르 라만 칸 장군은 두 아들 이름으로 계좌를 갖고 있었다. 그는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미국으로부터 각종 물자와 현금을 아프간의 무자헤딘에 전달하는 위치에 있었다. 1985년 로널드 레이던 당시 미국 대통령은 무자헤딘 지원자금을 감사하도록 지시한 바 있으나, 당시 칸 장군은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몇 년 뒤 칸 장군 아들의 계좌 잔고는 370만달러(44억원)으로 불어났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밖에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한창이던 2003년 요르단의 정보기관 책임자 사드 케이어는 2160만달러를 은행에 예치했고,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오랜 첩보기관 책임자도 크레디트 스위스에 계좌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내부고발자 등의 제보로 은행 등 거대 금융기관과 법률회사 등이 수상쩍은 배경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은밀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해준 사실이 드러난 건, 과거에도 2016년 이른바 ‘파나마 페이퍼’, 207년 ‘파라다이스 페이퍼’, 2021년 ‘판도라 페이퍼’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해 크레디트 스위스는 “지금과 금융거래 관행과 법률이 다른 과거에 벌어진 일로 지금은 대부분 폐쇄된 계좌”라며 “남아있는 계좌에 대해선 적절한 실사와 서류검토, 계좌 폐쇄를 포함한 통제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고 해명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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