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31일로 가동을 중단한 독일 바이에른주 군트레밍엔 원자력발전소의 모습.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원전을 녹색 에너지로 분류하는 방안을 1일 제시해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군트레밍엔/AP 연합뉴스
국제 환경정책을 선도하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원자력과 가스 발전에 대한 투자를 ‘녹색’으로 분류하는 초안을 내놔 원전에 반대하는 독일·오스트리아 등 일부 회원국과 환경단체들이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유럽연합 집행위가 1일(현지시각) ‘지속가능한 금융 분류체계’(녹색분류체계) 개정안 초안을 회원국들에 전달하면서 강한 반발에 부닥치고 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2일 전했다. 이 분류체계는 지속가능 금융 확대를 위해 2020년 7월 시행된 것으로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활동’을 정의하고 있다. 녹색 분류에서 제외되면 향후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지만 원자력과 가스 발전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를 두고 ‘원전 대국’ 프랑스와 탈핵의 선두주자 독일이 날 선 대립을 이어가 이 부분은 공백으로 비워 놨었다.
이번에 공개된 초안을 보면, 원전 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환경에 ‘심각한 해’를 끼치지 않는 것 등을 전제로 2045년까지 원전 건설에 대한 투자를 ‘녹색’으로 분류했다. 또, 가스 발전소의 탄소 배출량이 킬로와트시(㎾h)당 270g 이하일 경우 등의 조건을 충족하면 2030년까지 녹색으로 분류하는 내용도 담았다.
그러자 원전에 반대해온 국가들이 비판 의견을 쏟아냈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부 장관은 “이번 결정은 지속가능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이런 ‘위장 친환경’이 금융시장에서 수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슈테피 렘케 환경부 장관도 원전이 “대단히 파괴적인 환경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레오노레 게베슬러 오스트리아 환경부 장관은 “이 안은 기후와 환경에 유해하며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파괴할 것”이라며 개정안이 시행되면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단체 그린피스 역시 초안이 ‘위장 친환경’ 면허를 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번 초안에 대해 전체 에너지 사용에서 원전 비중이 70%를 넘는 프랑스의 승리로 평가된다고 지적했다. 프랑스는 지난 10월 불가리아·체코·핀란드·헝가리 등 9개 회원국과 함께 원전은 “비용이 적정하며 안정적인 핵심 에너지원”이라며 유럽연합에 원전을 녹색 에너지로 분류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2019년 현재 유럽 전체 에너지에서 원전의 비중은 26.2%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결정은 유럽연합 집행위가 당분간 풍력·태양광 등 재생가능 에너지만으로 유럽의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고 보고, 현실 노선을 택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또 지난가을 천연가스 가격 급등과 우크라이나 사태 등을 겪으며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전략적인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 집행위는 오는 12일까지 초안에 대한 회원국과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이달 중 최종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최종안은 20개국 이상의 회원국이 반대하지 않으면 유럽의회에 상정해, 과반수 찬성으로 확정된다. 이 과정에서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하지만 유럽 외교관들은 이 안이 회원국 다수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전했다.
세계 환경정책을 선도하는 유럽연합이 원전을 녹색 에너지로 규정하면 다른 나라의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한국은 지난달 30일 공개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에서 원전을 뺀 바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