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9일(현지시각) ‘일반 알현’을 주례하고 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조력 자살 합법화 반대 의사를 밝혔다. 바티칸/AP 연합뉴스
이탈리아 의회가 ‘조력 자살’ 합법화 논의에 착수한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있는 나라인데다가 가톨릭의 영향력이 커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커질 전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일 ‘일반 알현’을 주례하는 자리에서 조력 자살을 의료 윤리의 일탈로 규정했다고 <로이터> 통신 등이 보도했다. 교황은 “삶이 권리이지 죽음은 권리가 아니다”며 “죽음을 집행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교황은 말기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완화 치료’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렇게 도움을 주는 것과 죽음을 유발하는 일탈 행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력 자살은 의료인이 자살을 하려는 환자에게 약물 등을 제공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돕는 것을 말한다. 의료인이 적극적으로 환자에게 약물을 주입하는 안락사보다 간접적인 방식이다.
교황은 이어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들과 동행해야 하지만 죽음을 선동하거나 조력 자살을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또 “돌봄과 치료를 받을 권리에 우선 순위를 둬야 하며, 특히 고령층과 병자 같은 약한 이들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발언은 이탈리아 의회가 조력 자살 합법화 논의를 진행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2019년 9월 조력 자살을 부분적으로 합법화하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환자가 견딜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는 경우는 환자가 자살을 실행하도록 돕는 걸 처벌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헌재는 의회가 조력 자살 관련 법을 마련해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의회는 조만간 국가 보건 체계 안에서 조력 자살을 허용하고 조력 자살을 도운 의사가 소송을 당하지 않게 보호하는 내용의 법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좌파 진영은 법안 통과를 지지하는 반면 우파 진영은 반대하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기독교중도민주연합당(UDC) 소속 파올라 비네티 상원의원은 이 법안이 기독교 원칙에 반할 뿐 아니라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력 자살을 옹호하는 이들은 지난해 이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 청원 운동을 시작해, 최근 청원에 필요한 인원의 3배에 가까운 140만명의 서명을 받아 법원에 제출했다. 이들의 청원은 오는 15일께 심의될 예정이다.
여론은 조력 자살 지지가 반대를 압도하고 있다. 2019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5%가 조력 자살이나 안락사를 ‘전반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응답했고, 47%는 ‘특정 조건 아래서 허용해야 한다’는 방안을 지지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탈리아인의 92%가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유럽에서는 2001년 네덜란드가 가장 먼저 안락사와 함께 조력 자살을 허용한 이후 2002년 벨기에, 2009년 룩셈부르크가 합법화에 합류했다. 최근엔 독일·스페인·오스트리아도 잇따라 합법화 조처를 취했다.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의 일부 주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부 주도 조력 자살을 허용하고 있다.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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