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군사작전을 승인한 직후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 외곽에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군용차에 타서 이동하고 있다. 마리우폴/AP 연합뉴스
“만약 (침공)작전이 정말 준비되고 있는 것이라면, 내가 마음으로부터 하고 싶은 말은 하나밖에 없다. 푸틴 대통령,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을 멈춰달라. 평화에 기회를 줘보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숨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임박했다는 징후가 점점 분명해지던 23일 밤(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뉴욕에서 두번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가 열렸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절박한 목소리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자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푸틴 대통령은 24일 오전 6시께(모스크바 시각) 우크라이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군사행동을 지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그로부터 30분쯤 뒤 긴급 성명을 내놓아 이를 강력한 어조로 비난하며 “러시아에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전쟁을 향해 나아가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바라보며, 전세계가 그동안 마른침을 삼킨 것은 이 전쟁이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닌, 미국이 주도해온 현존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란 전략적 함의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전쟁의 방아쇠를 당기며, 1989년 미·소 정상이 모여 냉전 해체를 선언한 뒤 30여년 동안 이어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도전자’가 됐다. 그 결과 세계는 현상 질서를 유지하려는 미국과 그 동맹국, 이에 변경을 시도하는 러시아와 잠재적 협력자인 중국이라는 두개의 진영으로 나뉘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쟁이 가져온 변화를 동서가 날카롭게 대립했던 옛 냉전에 맞먹는 ‘신냉전의 도래’라 정의해도 무리가 없다.
냉전 이후 지난 30여년간 이어진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시장주의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였다. 냉전 시대의 미-소 양극 체제나,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여러 열강이 대결과 분쟁을 벌였던 체제와 구분된다. 이 체제는 다자적인 제도와 규칙에 기반해 있지만, 본질을 보면, 패권적 힘을 가진 미국이 유지해온 질서였다.
이 질서가 결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은 2008년께부터다. 결정적인 계기는 세계 금융위기였다. 이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등으로 요약되는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에 대한 회의를 전세계에 확산시켰다. 미국에선 세계화를 거부하는 오큐파이 운동 등이 벌어졌고, 유럽 등에서는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득세했다.
그 여파 속에서 2017년 1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출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떠받치는 패권국으로 미국이 부담해온 의무를 저버리고, 권리만을 챙기려 했다. 동맹들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국방비를 더 낼 것을 요구했다. 이는 유럽 동맹국들과 불화 등 동맹의 약화를 불러왔다.
2021년 1월 취임한 바이든 대통령은 동맹을 복원해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재확립을 도모하는 중이다. “현재 인류는 민주주의(democracy)와 권위주의(autocracy)의 ‘변곡점’ 위에 있다”는 말이 이를 잘 상징한다. 하지만 국내적으로 트럼프 지지세력들의 도전이 이어지며 대외정책의 집행력이 약화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중 대결에 집중하기 위해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결단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의 대외적인 신뢰도는 크게 실추됐다.
24일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의 씨앗이 뿌려진 시점도 2008년이라 할 수 있다. 냉전 해체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슬금슬금 동진을 시작했다. 1999년 폴란드 등 3개국, 2004년 발트 3국 등 7개국이 가입했다. 미국은 그해 4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 총회에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나토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했다. 수세에 몰렸던 러시아는 이 무렵 노골적 저항을 시작한다. 나토의 지속적 동진에 반발하던 러시아는 4개월 뒤인 8월 조지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 무렵부터 이대로 가다간 동유럽의 지정학적 경쟁이 부활해 ‘신냉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뤄낸 중국도 비슷한 시기 동중국해 등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한 재균형 정책에 나선다. 그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현재 진행 중인 대만 갈등은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유지될 수 있을지 가르는 중대한 시험대라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신냉전의 서막’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전쟁은 미국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 간의 세력권 다툼이고, 나아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와 세계관의 충돌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자신의 안보 우려를 내세우며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동진을 막고 우크라이나를 중립화하려 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1일 밤 러시아 전국에 중계된 대국민 담화에선 두 나라의 역사적 연원을 길게 언급해가며 우크라이나의 국가성 자체를 부인했다. 이에 맞서 미국은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이기 때문에 제3국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확립된 국가의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 원칙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11일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인 쿼드 외교장관과 한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위기를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 번영과 안정을 떠받치던 기본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며 “그 원칙들이 도전받는데도 응징하지 않는다면, 지구 반 바퀴나 떨어진 유럽에서 벌어진 일이 이곳(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쟁의 결론을 예측하긴 쉽지 않다. 다만, 장기적으로 미국의 경제 헤게모니를 잠식할 수 있다. 미국이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하면, 중국과 러시아의 경제 블록이 강화될 수 있다. 러시아의 자원·군사기술, 중국의 시장·돈이 합쳐지면, 미국의 헤게모니가 미치지 않는 거대한 유라시아 경제권이 형성될 수 있다.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연말 화상회담에서 “제3자(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노력을 가속화하겠다”고 합의했다. 이미 시행 중인 위안과 루블 결제 확대로 달러 패권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과 동맹국들이 준비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제재인, 국제 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에서 러시아 은행 퇴출도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발목을 잡고, 중·러 연대를 강화하며 신냉전의 문을 열어젖혔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뒤 이를 ‘역사의 종언’이라고 불렀다. 30여년이 지난 뒤 세계는 ‘역사의 종언’의 산물인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형해화되고 신냉전이 시작되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