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2021년 12월6일 인도 뉴델리에서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REUTERS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다수 국가가 이를 비난하는 가운데,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는 인도의 침묵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특히 민주주의를 기치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도 끌어안기’에 공을 들여온 미국의 낭패감이 클 것이다. ‘밀당’에 능한 인도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미국의 숙제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행보는 쿼드(Quad·미국, 인도,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4개국의 비공식 안보회의체)를 비롯해 동북아시아 안보 지형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후로 국제 무대에서 벌어진 외교전에서 한 차례도 러시아를 공개 비난하지 않았다. 2022년 2월11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쿼드 외교장관 회담 공동성명엔 러시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협박과 위험한 행동에 대한 복수 국가의 지지”를 규탄했지만 S. 자이샨카르 인도 외교장관은 쿼드 회원국이 대립보다는 협력과 협조에 주력하기를 바란다며 반기를 들었다. 인도는 2월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결의안에 중국 및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기권표를 던졌다. 미국 뉴욕에서 3월2일 열린 유엔 긴급특별총회에서도 러시아의 침공 규탄 및 철군 결의안에 기권했다. 다음 날 쿼드 정상회의에서도 ‘우크라이나 인도적 지원 메커니즘 구축’ 외에는 러시아를 규탄하는 어떤 내용도 없었다.
인도는 왜 침묵할까? 특정 국가의 외교·안보 노선은 역사적 경험과 위협 인식, 이에 따른 여론 등의 영향을 받는다. 첫째, 인도와 러시아의 역사적·지정학적 유대 관계는 70년 가까이 단단하게 다져온 것이다. 1947년 인도의 독립 이후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와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서기장의 관계는 긴밀하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 소련이 1950년대부터 인도에 경제·기술·군사 지원을 제공하면서 양국 관계가 깊어진다. 중국과 국경을 놓고 다투던 소련은, 역시 중국과 1962년 국경 전쟁을 치른 인도에 조건을 달지 않거나 낮은 가격으로 안보를 지원했다. 파키스탄과의 카슈미르 분쟁에선 항상 인도 손을 들어줬다. 심지어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인도를 협박하기 위해 전함을 보냈고, 소련은 전함을 쫓아내기 위해 해군을 파병했다.
이렇게 각인된 양국의 역사적 디엔에이(DNA)는 여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여론은 정책결정자들이 운신할 수 있는 외교안보 정책의 공간적 한계를 규정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미국의 한국전 참전(이른바 혈맹) 등이 한국인의 역사 정서에 뿌리박혀 구조적으로 외교정책의 방향을 돌리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인도의 경우에도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러시아를 사실상 ‘동맹’으로 여긴다고 알려진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인도의 소셜미디어 여론은 대체로 인도의 중립적 태도를 지지한다”며 “러시아에 대한 지지는 정치적 경계도 넘어선다”고 보도했다. 야당조차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고립시키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여론 지형에선 모디 같은 강력한 지도자도 러시아를 외면할 수 없다.
둘째로, 당면한 안보 위협과 관련해 중국의 경제·군사적 부상으로 인도와 중국의 국력 비대칭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게다가 남중국해에서 중국은 공세적으로 군사력을 투사한다. 인도는 2020년 인도 북부 갈완 계곡에서 중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인도가 중국의 부상에 헤징 전략으로 미국과 우호 관계를 증진하려는 이유다.
하지만 당장에는 러시아 무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메라 샹카르 전 미국주재 인도 대사는 “인도는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으로 무기 수입선을 다변화했지만 여전히 60%는 러시아산”이라고 독일 방송 <도이체벨레>(DW)에 밝혔다. T-90은 인도의 주력 탱크이고, 러시아 수호기와 미그기는 러시아 공군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도는 2018년 10월 푸틴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러시아로부터 첨단 방공미사일 S-400 미사일 5개 포대 분량(약 54억3천만달러) 구매 계약을 체결해 2021년 12월부터 도입을 시작했다. 모디는 2021년 12월 인도 뉴델리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하고, 2030년까지 유효한 10년간의 군사기술 협력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인도의 ‘이중 플레이’를 바라보는 미국과 서구의 속내는 복잡하다. 인도에 주재하는 서구 쪽 한 외교관은 미 외교 전문 사이트 <디플로매트>에 “펜스 위에 앉아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인도의 모습은 미국 및 다른 서구 국가들과의 관계 확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불편함을 표시했다.
수미트 강굴리 미국 인디애나대학 정치학과 교수도 <포린폴리시> 3월3일치 기고문에서 “미국과 다른 파트너 국가들의 인내심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며 “파트너 국가들도 인도에 입장권을 무한정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인도에 직접적인 비난을 자제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채택 무산 뒤 국무부는 자국 외교관들에게 ‘인도와 아랍에미리트의 카운터파트들을 만나 비판하라’는 전문을 보냈다가 곧바로 회수했다. 미국 편이 돼주지 않은 인도에 서운하면서도, 중국 견제라는 전략적 가치를 생각하면 버릴 수도 없는 미국의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유럽 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된 뒤 미국 외교정책의 무게추가 유럽에서 다시 중국으로 옮겨와도 인도에 대한 미국의 기대치는 이전보다 낮아질 것이다. 쿼드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도 탄력을 잃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미국이 ‘인도 끌어안기’에 대한 저조한 성적표를 만회하기 위해 오커스(AUKUS·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안보 동맹)의 역할을 더 강화하고, 동북아에서 조바심을 낼 수도 있다. 한·미·일 안보 협력 강화는 미국이 꺼내기 손쉬운 카드다. 한국이 속도와 완급을 조절하지 않으면 중국과의 관계 설정은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다.
이용인 기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