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2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시민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지 않은 난민이 고국을 떠났다. 전쟁의 참화를 피하려는 여성과 아이가 많다. 러시아에서도 전쟁 이후 ‘엑소더스’가 이어진다. 정보기술(IT) 전문가나 전문직 종사자가 대부분이어서 ‘두뇌유출’(Brain Drain)로 불린다. 권위주의적 통치에 거부감을 느끼던 터에 서구의 제재로 투자까지 막힌 탓이다. 옛소련 붕괴를 전후로 발생한 ‘대탈출’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는 러시아에 꽤 큰 경제적·인구학적·심리적 타격이 될 수 있다.
러시아 출신 경제학자 콘스탄틴 소닌 미국 시카고대학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최근 트위터에서 2022년 2월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모국을 떠난 러시아인이 3월8일까지 2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러시아 입장에선 특히 IT 인력의 탈출이 뼈아플 수 있다. 러시아 전자통신협회(RAEC)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 달여 동안 IT 업계 종사자 7만 명이 러시아를 떠났다고 한다. 4월에는 추가로 7만~10만 명이 출국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최신 통계는 아직 없다.
러시아 두뇌유출 증가는 최근 10년간 이어진 흐름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무엇보다 2000년, 2004년 연임 뒤 3연임 제한 규정 때문에 ‘실권 총리’에 머물러야 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3선 대통령으로 재집권한 2012년이 분기점이었다. 옛소련 붕괴 이후 국외 이주가 급증했으나 푸틴의 초기 집권기인 2000년대에는 이주가 급속이 줄며 진정됐다. 러시아연방통계청에 따르면, 1997년 국외 이주자 수는 23만2990명이었으나 이후 계속 감소해 2009년~2011년에는 매해 3만여 명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2012년 12만2750명, 2013년 18만6380명 등으로 치솟기 시작해 2014년 30만 명대, 2018년에는 40만 명대까지 올라섰다.
러시아 엑소더스 물결의 시작점인 2012년부터 2020년까지 러시아를 떠난 인구는 대략 260만 명에 이른다. 러시아 인구가 약 1억4500만 명인 점을 고려하면 그리 많은 수는 아니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기 두 해 전인 1989년부터 10년 동안 250만 명이 떠난 것과 비교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다.
무엇보다 푸틴 집권하에서의 국외 이주는 소련 붕괴 전후로 발생한 엑소더스와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러시아인들은 정치적 동기보다는 생계유지를 위해 서구로 이주했다. 그래서 ‘소시지 이주’라고 불렸다. 이에 비해 2000년대부터 이뤄진 이주는 정치적 동기가 적지 않다.
미국 싱크탱크인 애틀랜틱카운슬이 2000년 이후 러시아 이주자 400명을 대상으로 2017~2018년 심층 조사한 결과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응답자 가운데 40%는 이주 이유를 ‘정치적인 분위기’라고 답했다(복수 응답). 29%는 ‘박해와 취약한 인권’을 꼽았다. 응답자들의 평균 연령은 25~45살로 36%가 박사나 석사 학위를 갖고 있었다. 러시아의 정치적 분위기가 젊은 고급 두뇌들을 불편하게 한다고 유추할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뇌유출 원인도 큰 틀에서 보면 이와 다르지 않다. 세부적으로는 애플 등 서구 IT 기업들의 철수나 제재로 스타트업들의 투자 실패, 강제징집의 두려움이 섞여 있다. 하지만 밑바닥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현재 러시아에 남은 IT 인력이 우크라이나 침공에 가장 비판적이라는 보도도 있다.
실제 세계적으로 성공한 스타트업들의 뒤에는 서구로 이주한 러시아인이 꽤 있다. 2015년 영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해 유니콘기업으로 성장한 모바일뱅킹 앱 ‘레볼루트’(Revolut)의 니콜라이 스토론스키가 대표적이다. 레볼루트는 2021년 약 330억달러(약 40조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협업 플랫폼인 미로(Miro)도 두 러시아 기업인이 창업해 현재 180억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다.
러시아 인력들의 우수성은 정평이 나 있다. 이리나 플랙스 애틀랜틱카운슬 비상임연구원에 따르면 러시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2번째로 교육 수준이 높다. 러시아인의 96%는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장을 보유하고 있다. 연구개발 인력은 67만9천 명으로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4번째 규모다. 러시아는 물리, 공학, 수학, 화학, 인공지능(AI), 로봇공학 등에서 세계적인 선도국이다. 또한 IT 인력은 180만 명가량으로 프로그램과 사이버보안 전문가가 많다.
고급 인력 유출이 장기적으로는 러시아의 생산성과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AI와 5세대(5G) 기술이 발전하면서 러시아에서도 IT 분야 전문가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도 인력 유출을 걱정하는 징후가 있다. 푸틴 대통령은 3월2일 IT 기업에 3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대출을 지원하는 등의 시행령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 정도 조처로 엑소더스가 멈출지는 의문이다.
러시아 고급 두뇌를 잡기 위한 각국의 경쟁도 불붙을 수 있다. IT 인력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이스라엘이 적극적이다. 러시아와 인접한 조지아, 중앙아시아 국가, 터키 등도 반색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치하의 독일 과학자들을 불러들여 항공, 미사일 기술, 핵무기, 우주개발 프로그램을 크게 발전시킨 미국도 러시아 인력에 주목한다. 플랙스는 싱크탱크 홈페이지에 “최고 재능을 지닌 러시아 인력을 낚아채면 새로운 기술과 혁신 능력이 유입돼 미국 경제를 부양시킬 뿐 아니라 미국 국가안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썼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인적자본 유출로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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