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생존자인 한 여성이 11일(현지시각) 사건 당시 숨진 친척들의 무덤 근처에서 기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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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민족갈등이 터져나와 극렬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1995년 7월, 보스니아의 스레브레니차라는 곳에서 세르비아군이 주민들을 끌고 가 학살한 뒤 구덩이에 한데 묻었다. 희생자가 8000명이 넘었고, 모두 무슬림 보스니아 남성들이었다. 유엔이 파견한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들은 세르비아군을 막지 않았다.
27년이 흐른 뒤인 지난 11일, 보스니아를 방문한 카이사 올롱그렌 네덜란드 국방장관은 당시 학살을 방치한 자국 군의 행위에 대해 사과를 했다. 추모식에 참석한 장관은 “끔찍한 대량학살의 책임은 세르비아 군대에 있지만 국제사회가 주민들을 적절히 보호하지 못한 것 또한 확실하다”고 인정했다.
발칸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가장 참혹한 사건인 스레브레니차 학살은 책임자를 벌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이 집중됐던 사안이다. 전쟁범죄자로 지목된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 등 당시 세르비아 지도자들은 1995년 곧바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기소됐다. 1999년 유엔 사무총장 명의의 사건 조사 보고서가 발표됐고 2002년에는 네덜란드 정부의 보고서가 나왔다. 2005년에는 미국 의회가, 2009년에는 유럽의회가 학살을 규탄하고 전범들의 책임을 묻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당시 상황을 담은 비디오들이 공개되고 집단매장지들이 추가로 발굴되고 조사가 이뤄지는 동안 ‘더치뱃’(Dutchbat), 즉 네덜란드 군대의 과거 행위는 누차 비난을 받았다. 단순히 무력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보스니아 주민 몇몇을 학살자들에게 되돌려보내 결국 살해되게 만든 정황들이 드러났다. 2002년 빔 콕 당시 총리는 “잘못한 것도 있지만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가 결국 사퇴해야 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국방장관의 사과로까지 이어졌지만 어쩐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네덜란드는 학살의 주범이 아니다. 학살을 저지른 세르비아 쪽도 2010년 의회가 사과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의원 과반수를 단 2표 넘겼다. 세르비아 안에서는 사건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계속 새어나왔다. 2012년 토미슬라브 니콜리치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은 “학살은 없었으며 그 전쟁범죄는 일부 세르비아인들이 저지른 것뿐”이라고 했다. ‘보스니아의 학살자’라 불렸던 전범 카라지치가 2008년에야 붙잡힌 것도 세르비아의 비호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국제사회도 일관되게 진상을 밝히려 노력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적인 예로, 학살 20주년인 2015년 7월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고 공식 규탄하려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이 러시아의 거부로 무산됐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학살과 고문 등 반인도 범죄를 저질러 비난받는 시점에 네덜란드의 ‘과거사 사죄’가 나왔다. 정치적인 해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가 사과하기 하루 전인 지난 10일 유럽연합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 주제프 보렐은 당시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는 성명을 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대량 살인과 전쟁범죄는 1990년대 발칸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생생히 되살려내고 있다. 스레브레니차의 학살을 유럽 공통의 역사로 기억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의무가 되고 있다.”
네덜란드의 사과가 찝찝한 느낌을 주는 또 다른 이유는 네덜란드의 과거 자체에 있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남부에서 벌어진 학살도 그들의 역사적 범죄 중 하나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일본군에 잠시 점령돼 있던 옛 식민지를 재점령한 네덜란드군은 남술라웨시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려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벌였다. 게릴라들을 붙잡는 대로 죽이는 즉결처형 보복을 하거나, 마을들을 포위한 뒤 성인 남성들을 모아놓고 학살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과 똑같은 제노사이드였다. 인도네시아 쪽은 당시 4만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하며, 네덜란드 학자들의 조사에서는 3000~40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됐다. 자바 서부 라와게데에서도 네덜란드군은 400여명을 집단학살했다.
정의를 찾으려는 피해자들의 싸움은 길고도 길었다. 라와게데 사건에 대해 네덜란드 법원이 “전쟁범죄에는 시효가 없다”며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은 2011년에 이르러서였다. 2년 뒤인 2013년 마르크 뤼터 총리는 “1945~1949년 네덜란드군에 의해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처형들을 공식 사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거의 군사작전들 전체가 아닌 ‘처형’에 대해서만 사과하는 것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독립전쟁으로 인도네시아인 10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네덜란드 정부가 완전히 책임을 인정한 적은 없었다. 1969년에도 ‘공식 조사'를 했으나 “우리 군대는 전반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5년에야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었다”고 인정했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올해 2월 사과를 하면서도 뤼터 총리는 “이 보고서는 법적인 관점이 아니라 역사적인 관점에서 쓰인 것”이라며 전쟁범죄가 배상 책임으로 이어지는 것을 피하려 애썼다.
과거의 잔혹행위를 규명하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것은 역사를 배우고 기리는 중요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런 사죄가 나오기까지 언제나 힘겨운 싸움이 필요하다. 오늘의 강자들이 어제의 강자들 편에 서는 일이 숱하게 벌어지며, 때론 과거가 현재에 이용되기도 한다. 1차대전 무렵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자 영국은 그 잔혹성을 널리 퍼뜨리며 당시 제국령에 살던 아랍 민족들의 독립투쟁을 부추기는 소재로 활용했다. 이번 세기 들어와 튀르키예(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에 목을 매고 있던 때에, 무슬림 튀르키예 노동자들이 밀려올까 걱정한 유럽국들은 100여년 전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문제 삼았다.
‘아르메니안 제노사이드’는 쿠르드족에 대한 박해와 함께 튀르키예의 인권 문제를 비판하는 주된 소재가 돼왔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튀르키예가 방해하자 미국은 쿠르드족 지원을 포기하면서 튀르키예를 달랬다.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 역시 미국 정부가 중국을 압박하는 ‘인권 잣대’로 활용되고 있지만 러시아에 대항해야 한다는 대의 앞에서 언제 슬그머니 사라질지 모른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대러 봉쇄 협력을 논의하고 11월 양국 정상회담을 준비한다는 마당에.
보편적 인권은 가장 중요한 가치이지만 국제정치 앞에서 쉽사리 흔들린다. 역사의 진실은 책이 아닌 현실 정치 속에서 힘겹게 찾아내야만 빛을 발하는 법이며, 그 단면들이 언제나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