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에서 러시아 군인들이 수력발전소 앞을 지키고 있다. 헤르손/AP 연합뉴스
2014년 3월 러시아가 강제병합한 크림반도에 주둔하다가 우크라이나 남부 전투에 투입됐던 러시아군 강습 부대원이 부당한 침공을 상세히 폭로하는 장문의 글을 공개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러시아군 제56근위공중강습연대 소속의 파벨 필라티예프(34)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이뤄진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나는 이 전쟁에서 정의를 확인할 수 없다. 진실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신문은 이런 내용이 담긴 인터뷰를 17일 공개하면서 그가 인권단체의 권고를 받아들여 13일 러시아를 떠났다고 전했다. 전쟁 반대를 명분으로 조국을 떠나며 사실상 ‘탈영’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군 56 수비대 공중강습 연대 소속의 파벨 필라티예프(34). <가디언> 갈무리
필라티예프는 이날 공개된 인터뷰에서 “참전해 전투를 벌이는 건 두렵지 않다. 그러나 정의감을 느껴야 하고,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걸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며 “정부가 모든 걸 앗아 갔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되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필라티예프는 약 2주 전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크라이나 남부에 투입된 뒤 헤르손 항구를 점령하고, 서쪽에 자리한 도시 미콜라이우 인근에서 한달 이상 포화 속에 버티다가 부상을 입고 후송되는 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상세하게 공개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이번 침공의 부당함을 폭로해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미콜라이우 근처에서 포격을 당하며 버티다가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이 짓을 중단시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결심했다.”
필라티예프는 전쟁 일지에서 자신이 속한 부대가 지난 2월 말 제대로 장비도 갖추지 못하고 구체적인 병참 계획과 목표도 없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됐다고 썼다. 그는 자신이 왜 전쟁을 벌이는지도 모른 채 “투입된 지 몇주 뒤에야, 러시아에서 전쟁이 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러시아군의 정예로 꼽히는 강습 부대원들의 약탈 행위도 폭로했다. 그는 부대원들이 헤르손 항구를 점령한 직후 컴퓨터 등 값나가는 물건들을 마구 챙긴 뒤 음식을 구하려고 부엌을 뒤졌다고 했다. “우리는 마치 야만인처럼 모든 걸 먹어 치웠다. 오트밀, 잼, 꿀, 커피…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미 우리는 극한으로 내몰린 상태였다. 우리 대부분은 야전에서 한달 이상 버티며 샤워도 하지 못했고 제대로 된 음식도 구경하지 못했으며 어떤 위안거리도 없었다.” 이어 “주변의 모든 것이 극도로 불쾌하게 느껴졌고, 마치 아귀처럼 우리는 단지 살아남으려 했다”고 덧붙였다. 동료들의 약탈에 대해선 “합리화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이를 어떻게 중단시킬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한 개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라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의 공세가 격화되고 있는 남부 전선의 전황에 대해선 미콜라이우 인근의 참호에서 한달 동안 포격을 당하며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후송된 뒤 보상금 300만루블(약 6500만원)을 받으려고 자해하는 일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썼다. 이어, “많은 군인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과 정부, 지휘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그의 정치 등에 대해 불만스러워한다”고 밝혔다.
글을 공개한 뒤 부대원들은 모두 연락을 끊었지만, 필라티예프는 “동료들 중 20%는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할 거라 믿고 있다”고 말했다. 기록을 공개한 뒤 경찰을 찾아가려 했으나, 인권운동 네트워크 ‘굴라구.넷’(Gulagu.net)의 활동가가 만류하며 외국으로 갈 것을 권고했다. 2주 동안 이를 거부하고 숨어 지냈으나, 13일 결국 러시아를 떠났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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