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앞에 유엔 상징이 표시되어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핵 재앙 우려가 커진 가운데 열린 제10차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가 러시아의 반대로 결과문을 채택하지 못한 채 26일(현지시각) 막을 내렸다. 2015년의 9차 회의에 이어 이번에도 191개 전체 회원국이 합의 도출에 실패함에 따라 핵군축의 진전을 기대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에이피>(AP) 통신 등 주요 외신들은 지난 1일 미국 뉴욕 유엔(UN)본부에서 시작된 핵확산금지조약 평가회의가 26일 회의 시간을 연장해가면서 막판 논의를 이어갔으나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 회의는 애초 2020년 개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대유행 여파로 2년 늦춰 개최됐다.
이고리 비시네베츠키 러시아 외교부 비확산 및 군비통제국 부국장은 “안타깝게도 이 문서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지 못했다”며 36쪽의 최종 초안에 많은 나라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와 프랑스 대표는 각각 ‘비동맹 운동’ 회원국 120개국과 유럽연합(EU) 등 56개국을 대표한 발언에 나서,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표시했다.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28일치에서 러시아 대표단이 전체 회의가 열리기 불과 네 시간 전인 26일 오전 11시께 “중요 변경이 이뤄지지 않는 한 우리는 합의할 수 없다”는 뜻을 구스타보 슬라우비넨 의장(아르헨티나)에게 전해왔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최종 초안에 담긴 자포리자 원전에 대한 언급 부분 때문으로 보인다. 이날 공개된 초안을 보면, 자포리자 원전과 인근 지역에서의 군사활동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초안엔 또 “우크라이나가 이 원전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원전 내 핵물질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핵물질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걸 막으려는 원자력기구의 노력을 지지한다” “결정권 있는 우크라이나 기관의 (원전) 통제를 보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러시아 <타스> 통신은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자포리자 원전에 대한 논의 뒤 러시아가 합의에 반대했다고 전했다.
애덤 셰인먼 미국 비확산 특별대표는 “오늘 합의를 이루지 못한 건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가 막판에 수정하려던 사항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를 지도에서 없애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슬라우비넨 의장도 최종 초안은 “세계가 분쟁 그리고 핵전쟁 가능성의 증가로 점점 고통받고 있는” 시점에 진전된 결과를 얻길 기대하는 당사국들의 다양한 관점과 기대치를 담으려 애쓴 결과물이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막판 ‘몽니’로 합의문 도출에 실패하면서, 핵군축을 이루려는 국제 사회의 움직임도 크게 후퇴하게 됐다. 베아트리스 핀 ‘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ICAN)의 사무총장은 영국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최종 초안의 핵군축 관련 부분은 미국·러시아·프랑스·영국·중국 등 5대 공식 핵보유국들에 의해 이미 약화된 상태였다며 “핵보유국들은 아무 것도 이뤄내지 못함으로써 아주 위험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나아가 “어느 순간에 가면 핵무기가 없는 나라들은 이 조약이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15년에 열린 제9차 평가회의 때도 중동에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자유 지대를 설정하는 문제를 놓고 주요국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면서 결과문을 채택하지 못했다.
핀 사무총장은 평가회의가 합의 도출에 계속 실패하고 있다면서 ‘핵무기금지조약’(TPNW)에 더 많은 나라들이 동참해야 한다고 밝혔다 핵무기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의 이 조약은 지난해 1월 정식 발효됐으며, 지금까지 66개국이 비준 또는 가입했다. 5대 공식 핵보유국, 보유 추정국, 한국 등 핵우산에 포함된 나라 등은 이 조약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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