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으로부터 되찾은 남부 헤르손시에서 19일(현지시각) 러시아군의 폭격을 당한 건물에서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 헤르손/AP 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전력 시설 등 기반시설에 대한 폭격을 그치지 않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의 전력 공급이 날로 불안해지고 있다. 전체 인구의 40% 정도가 제대로 전력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민간 전력 회사 대표는 전력난 해소를 위해 외국으로 가서 몇달 머물러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나섰다.
<에이피>(AP) 통신은 19일(현지시각) 겨울로 접어든 우크라이나에서 전체 인구의 40% 정도가 전기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영 전력망 운영사 우크레네르고는 겨울철을 맞아 기온이 떨어지면서 전력망에 가해지는 압박이 한층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회사의 볼로디미르 쿠드리츠키 최고경영자는 현지 방송에 출연해 “우리는 언제나 최악에 대비해야 한다. 적들은 우리의 전력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정전 사태를 장기화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병원이나 학교 같은 중요 시설에 대한 전력 공급은 안정된 상태라고 덧붙였다.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은 수도 키이우조차 극심한 전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국이 순환 정전을 실시하면서 이 도시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인 150만~200만명이 주기적으로 암흑 상태에 빠지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러시아군이 기반시설 파괴를 통해 불안감을 일으켜 항전 의지를 꺾으려 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불안해하기보다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제2 도시 하르키우가 속한 하르키우주에서도 공습이 이어지면서 전력 시설이 많이 손상됐다고 올레 시니에후보우 주지사가 밝혔다. 러시아군은 남부 자포리자주와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헤르손주에서도 폭격을 이어갔다.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우크라이나 최대 민간 전력 회사 디테크의 최고경영자가 나서 국민에게 가능하면 당분간 외국에 가서 머물러달라고 호소했다. 이 회사의 막심 팀첸코 최고경영자는 영국 <비비시>(BBC) 방송 인터뷰에서 “국민이 3~4달 동안 머물 곳을 구할 수 있으며 전력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우크라이나 전체 전력의 25% 정도를 공급하고 있다. 팀첸코 최고경영자는 러시아의 공습이 벌어질 때마다 전력망이 불안해지고 있다며 전력 소비를 줄이는 게 전력망 유지에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팀첸코 최고경영자는 우크라이나가 여전히 수요를 감당할 만큼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며 “전력 소비를 줄이면, 부상당한 병사들이 입원한 병원들에 대한 전력 공급이 끊기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에너지 분야에서 긴밀하게 협력해왔기 때문에 러시아 쪽에서 자국 상황을 잘 안다며, 러시아가 협력을 통해 얻은 지식을 러시아군의 공격에 이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정부 당국은 전력난에 대한 불안감 확산을 경계하고 나섰다. 우크라이나 에너지부는 이날 성명을 내어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매체 등을 통해 퍼지고 있는 공포감에 가득찬 발언들은 사실과 다르다”며 “에너지 공급이 어렵지만 상황은 통제되고 있다”고 밝혔다. 우크레네르고도 미리 계획된 정전이 20일에도 발생할 것이지만, 예고되지 않은 전력 차단 사태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러시아군이 쫓겨난 남부 핵심 도시 헤르손에서는 주민들이 전쟁터 사이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할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긴장하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구호품을 얻으려 시내에 나왔던 주민 이호르 메체리코우는 “강(드니프로강) 이쪽 편에 군인들이 집결하고 있고, 저쪽 편에도 병력이 모이고 있다”며 “우리가 중간에 끼어 결국 마리우폴과 같은 상황에 처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은 러시아군이 지난 5월 완전히 점령할 때까지 3달 가량 완전 포위한 채 공격을 퍼부어 도시 전체가 폐허로 뒤바뀐 곳이다. 그의 아내는 “문제는 우리가 굶주리고 있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러시아군의) 점령 때문에 일거리를 잃었다”고 걱정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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