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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장쩌민 사망…‘천안문’ 이후 중국 고도성장 길닦아, 향년 96

등록 2022-11-30 18:04수정 2022-12-01 02:45

1989년 천안문 운동 진압과정 덩샤오핑이 발탁
WTO 가입 등 중국 세계경제 체제에 편입시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AFP 연합뉴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AFP 연합뉴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뒤를 잇는 중국의 ‘3세대 지도자’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30일 사망했다. 향년 96.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장 전 주석이 이날 낮 12시13분(현지시각) 상하이에서 백혈병, 다발성 장기부전 등으로 치료를 받다 숨졌다고 전했다.

장 전 주석은 천안문 민주화운동 직후인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총서기직에 오른 뒤 2002년까지 13년 남짓 중국을 이끌었다. 천안문 운동과 소련 붕괴 등으로 혼란을 겪던 시기에 중국의 지도자로서 정치 안정과 경제 성장의 토대 마련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중 수교(1992년)와 홍콩 반환(1997년) 및 마카오 반환(1999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2001년) 등 현재 중국을 만든 굵직한 사건이 그의 임기에 이뤄졌다.

1926년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장 전 주석은 상하이교통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기술 관료의 길을 걸었다. 대학 시절인 1946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졸업 뒤 상하이 공장 등에서 일하다 1955년 소련 모스크바의 스탈린 자동차 공장에서 1년간 유학했다. 기술 관료로 두각을 나타낸 장 전 주석은 1983년 새로 만들어진 전자공업부 부부장(차관), 6월엔 부장(장관)을 맡았다. 1985년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의 시장을 맡으면서 기술 관료가 아닌 본격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89년 4~6월 천안문 운동은 장 전 주석에게 중국 최고지도자의 길을 열어줬다. 상하이 당 서기였던 장쩌민은 상하이 대학생들의 시위를 무난히 해결했다. 이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베이징 시위를 강경 진압하려는 실권자 덩샤오핑의 입장을 옹호해 신뢰를 얻었다. 덩은 유혈 진압에 반대한 자오쯔양 당시 총서기를 경질하고, 상하이에 있던 장쩌민을 불러올려 당 총서기와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맡겼다. 장 전 주석은 훗날 “내가 베이징으로 올라갈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30일 96살로 숨진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1999년 10월1일 천안문(톈안먼)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 행사에 참석해 중국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장 전 주석은 천안문 운동이 발생한 직후인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당 총서기직에 올라 2002년까지 13년 동안 중국의 경제발전을 이끌었다. 베이징/신화 연합뉴스
30일 96살로 숨진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1999년 10월1일 천안문(톈안먼)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 행사에 참석해 중국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장 전 주석은 천안문 운동이 발생한 직후인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당 총서기직에 올라 2002년까지 13년 동안 중국의 경제발전을 이끌었다. 베이징/신화 연합뉴스

장 전 주석은 천안문 운동과 소련 붕괴 등으로 흔들리던 중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그가 당 총서기에 오른 1989년 1조7200억위안(약 318조8천억원)에서 퇴진하던 2003년 12조1700억위안으로 7배 성장했다. 특히 2001년 미국과의 오랜 협상을 통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성사시켜, 중국이 세계 경제에 편입돼 고도성장할 수 있는 길을 닦았다. 민주화는 부정하고, 경제 개방은 옹호한 장 전 주석의 노선은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대 중국의 모습을 결정지었다.

2000년에는 공산당의 지지 기반을 넓히는 ‘3개 대표론’을 내놨다. 이는 공산당이 노동자·농민뿐만 아니라 자본가(선진생산력)와 지식인(선진문화 발전)의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노동계급 정당인 공산당을 국민정당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최고지도자가 된 뒤 상하이 출신을 규합해 주요 정치 세력인 이른바 ‘상하이방’을 만들었다. 2002년 다른 계파인 공산주의청년단에 속하는 후진타오에게 당 총서기직을 넘겼으나, 2004년까지 당 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하는 등 영향력을 유지했다. 2007년에는 시진핑이 후진타오에 이어 차기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썼다.

하지만 시 주석 시대에 들어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자신의 계파에 속했던 보시라이 전 충칭시장, 후진타오 정권의 공안 실권자였던 저우융캉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궈보슝·쉬차이허우 전 군사위 부주석 등이 ‘부패와의 전쟁’으로 잇따라 숙청됐다. 지난 10월 중순 시 주석의 3연임이 확정된 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에도 건강 악화로 참석하지 못했다.

베이징/최현준 특파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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