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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목숨 건 ‘히잡 시위’ 100일, 이란의 거리 풍경 바꿨다

등록 2023-01-02 06:00수정 2023-01-02 18:01

[100일 넘어선 이란 반정부 시위]
머리 드러낸 여성들 태연히 테헤란 거리 활보
이란 역내 고립 심화…국제정세에도 큰 영향
똑 부러진 ‘구심점’ 없어 정권 뒤집긴 힘들 것
25일 이란 테헤란의 거리 풍경. 젊은이들이 히잡을 쓰지 않거나 산타 모자를 쓰는 등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다. 테헤란/AFP 연합뉴스
25일 이란 테헤란의 거리 풍경. 젊은이들이 히잡을 쓰지 않거나 산타 모자를 쓰는 등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다. 테헤란/AFP 연합뉴스
“총을 맞는 순간 큰 고통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총을 쏜 보안군이 웃고 있었다. 고통이 심해 병원에 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신원이 밝혀져 체포된다.”

이란 청년 마수드Masoud는 지난달 21일 <비비시>(BBC) 영상 인터뷰에서 100일 넘게 진행 중인 ‘히잡 반대’ 반정부 시위로 인해 살벌하게 변한 이란의 분위기를 ‘총상을 입고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결국 병원 대신 이라크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은 마수드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란 반정부 시위 참가자들은 보안군이 쏜 산탄총(구슬 수십개가 내재된 총)과 새총을 온몸에 수십발 맞고도 체포와 그 후 겪게 될 고통이 두려워 병원에 가지 못한다. 결국, 특별한 의료 지식이 없는 동료들이 몸에 박힌 총알을 빼내는 과정에서 부상이 악화돼 숨지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비비시>는 이란에서 이렇게 숨진 이들의 규모는 파악조차 힘들다고 전했다.

보안군으로부터 산탄총과 새총을 맞은 이란 시위참여자. 비비시 갈무리
보안군으로부터 산탄총과 새총을 맞은 이란 시위참여자. 비비시 갈무리
지난 9월16일 22살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의문사한 다음날부터 시작된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해를 넘기며 1일 현재 107일째를 맞았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가장 오래 이어지는 반정부 시위의 열기는 한 겨울 날씨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이란인들은 큰 희생을 치르면서 조금씩 가시적인 결과물을 얻어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위의 직접 원인이 된 시민들의 복장을 단속하는 ‘지도순찰대’(도덕경찰)가 사실상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이다. 소셜미디어 방송 <월스트리트실버>(Wall Street Silver)는 지난달 26일 이란 시내 풍경이 담긴 여러 영상과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염색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걷거나, 머리 위에 살짝 히잡이나 야구 모자, 베레모, 산타 모자 등을 멋지게 걸치고 테헤란 중심가를 당당하게 걷는 여성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현재 이란의 거리에선 머리를 감싸는 스카프를 쓸지 안 쓸지, 여성들이 선택하는 자유가 늘어난 모습”이라고 전했다.

염색을 한 머리를 자연스럽게 드러낸 여성들이 테헤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트위터 갈무리
염색을 한 머리를 자연스럽게 드러낸 여성들이 테헤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트위터 갈무리
뚜렷한 변화가 외부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초였다. <에이피>(AP) 통신은 지난달 5일 시위가 시작된 뒤 이란 전역에서 히잡을 쓰지 않은 채 걷는 여성이 증가하고 사실상 거리에서 복장 단속을 하는 도덕경찰의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고 전했다. 이런 보도를 간접 확인하는 정권 핵심 당국자의 발언도 나왔다. 모하마드 자파리 몬타제리 이란 검찰총장은 지난달 3일 종교회의에서 한 회의 참석자가 ‘도덕경찰은 왜 폐지됐나’라고 묻자, “지도순찰대는 사법부와 무관하다”고 답해 ‘우발적’으로 폐지 사실을 인정했다. 이란 정부가 도덕경찰을 없앴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한 적은 없어, 이를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나온다. 다만, 현재 이들이 활동을 멈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에이피>는 이에 대해 “대중을 달래고 적어도 시위를 끝낼 방법을 찾는 정부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란인들이 계층·세대·지역을 불문하고 100일 넘게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7일엔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여동생까지 나서서 “오빠를 반대한다”, “국민을 지지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젠지(Gen Z) 세대’ 등 젊은이들이 대거 시위에 참가하면서 이란 성직자들의 터번을 몰래 벗기고 달아나는 새 시위 문화까지 생겨났다. 이란 인권운동가통신(HRANA)은 지난달 25일 기준 시위 참가로 507명이 숨지고 1만85000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숨진 이 가운데 13.6%(69명)는 미성년자였다.

이번 시위가 국내보다 중동 정세에 더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는 지적도 있다. 디아코 호세이니Diako Hosseini 이란 전략국제연구소the Center for Graduate International Studies 선임연구원은 <알자지라>에 “이란의 소요 사태가 국내보다 외교관계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이란의 잔인한 시위 진압과 이 무렵 공개된 러시아에 대한 ‘공격용 드론’ 수출 의혹으로 복원 교섭이 진행되던 이란 핵협정(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나아가 이란에 상대적으로 동정적이던 유럽과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도 대이란 제재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이란은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에선 제명되는 수모를 겪었다. 오랫동안 공 들여온 중국과 역내 ‘라이벌’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강화되고 있는 점도 골칫거리다.

28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린 국제 체스 대회에 히잡을 쓰지 않고 참석한 사라 카뎀 선수. 알마티/로이터 연합뉴스
28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린 국제 체스 대회에 히잡을 쓰지 않고 참석한 사라 카뎀 선수. 알마티/로이터 연합뉴스
시위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똑 부러진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이번 시위가 에브라임 라이시 대통령이 이끄는 현 이란 정부를 무너뜨리진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알자지라>는 지난달 27일 반정부 시위가 새해에도 쉽게 잦아들진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지난 100여일에 걸친 ‘경험’이 이란 정부와 국민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안보 씽크탱크인 ‘애틀랜틱 카운슬’의 시나 아조디Sina Azodi 비상임 연구원은 <알자지라>에 “이란 정부가 시위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시위가 계속될 것”이라며 “정부가 시위를 진압하려면 계속 같은 수준의 잔인함을 보여 줘야 하는데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시위의 장기화되며, 이란 경제는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됐다. 반정부 시위로 인한 잦은 파업과 정부의 인터넷 차단으로 인해 2018년 원유 수출 금지 등 가혹한 경제제재 부활로 어려움을 겪어온 이란 기업들이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실제, 이란 중앙은행은 최근 물가상승률이 40%대를 훌쩍 넘어 약 50%대에 이른다고 인정했다. 이란 외환시장 환율고시 사이트 ‘본바스트’(Bonbast)에 따르면, 미국 달러 대비 리알화 환율은 지난달 30일 기준 1달러에 4만2700토만(10리알)로 사상 최저 수준이다. 시위가 발발한 9월17일 3만1900토만에 견줘 약 33.8%가 하락했다. 지난달 29일 라이시 대통령은 “환율 하락을 제어해야 한다”며 중앙은행 총재를 교체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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