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서부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젤레네에서 주민이 눈을 맞으며 구호단체에서 주는 구호품을 받고 있다. 젤레네/AP 연합뉴스
‘신냉전’의 서막을 열어젖힌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24일로 1주년이 된다. 애초 예상과 달리 서구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장기전’이 되고 만 이 전쟁을 통해 새롭게 구성될 유럽과 세계의 새 질서의 모습을 결정지을 여러 요소들이 명확해졌다.
첫째, 이 전쟁으로 러시아에서 ‘완전히 독립된’ 우크라이나가 탄생했다. 러시아는 옛 소비에트연방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세력권에 완전히 ‘재편입’시키기 위해 이번 전쟁을 감행했다. 하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끈질긴 항전으로, 우크라이나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한 민족국가로 재탄생했다. 둘째는 2014년 이후 러시아에 편입되거나 이후 내전이 이어져온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의 지위다. 러시아계 주민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지역도 이번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 복귀하기가 사실상 어렵게 됐다.
이런 ‘엄연한 현실’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 모두에 적잖은 고민을 안겨준다. 특히 크림반도와 돈바스의 향후 지위 문제가 평화협상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포함한 모든 러시아 점령지의 탈환 목표를 꺾지 않고, 러시아는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넘어서 자포리자주와 헤르손주까지 병합을 끝낸 상태다. 이 핵심 쟁점에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종전의 해법 찾기는 어려워진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은 지난 1년간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지난해 2월24일 시작된 전쟁 초기에 러시아는 키이우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젤렌스키 정권을 참수하려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끈질긴 저항으로 러시아는 3월 말~4월 초 키이우 등 북부 전선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5월부터 이번 전쟁의 주전선인 돈바스에서 공세를 강화하며 점령지를 확대했다.
하지만 8월 말 미국 등에서 장거리 공격무기를 지원받은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이 이뤄졌다. 러시아는 9월 이후 동부 하르키우와 남부 헤르손주의 넓은 점령지를 내줘야 했다. 결국 11월 초엔 헤르손시를 포기하고 드니프로강 동안으로 병력을 빼 전열을 정비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이후 러시아는 다시 동부 돈바스에 전력을 집중해 12월 이후 격전지인 바흐무트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이어 전쟁 1주년을 맞아 대공세가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이어지는 중이다.
러시아는 이 과정에서 젤렌스키 정권을 제거하고 우크라이나에 ‘친러 정부’를 세운다는 목표를 사실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동남부 점령지 굳히기로 들어갔다.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지난해 9월 말 동남부 4개 주에 러시아에 합병할지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해 10월 초 합병을 마무리했다.
이 전쟁은 중요한 ‘분기점’을 지나고 있다. 전쟁 1주년을 즈음해 시작될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의 대공세 때문이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은 13일 “러시아가 더 많은 군대, 더 많은 무기, 더 많은 전력을 투입하고 있다”며 대공세가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가 “막대한 손실을 무릅쓰고 더 많은 전력을 투입해 우크라이나인들을 압박”하고 있다며 “우리는 보급 경쟁에 돌입했다. 러시아군이 주도권을 쥐기 전에 탄약·연료·부품 등 핵심 군사 역량이 우크라이나에 도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우크라이나의 반격에 강조점을 뒀다. 그는 1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우크라이나 국방연락그룹’(UDCG) 회의를 주재한 뒤 기자회견을 열어 “우크라이나가 봄의 어느 시점에 (러시아를 상대로) 공습을 개시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를 위해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과 장갑차에 이어 에이브럼스(미국)와 레오파르트2(독일) 등 주력 전차를 지원하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 국방부는 3일엔 사거리 150㎞에 이르는 유도 폭탄인 ‘지상 발사형 소구경 폭탄’(GLSDB) 등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무기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결국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대공세를 막아내고 반격에 나서려면 서구의 신속한 군사 지원이 필요하다. 올하 스테파니시나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11일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가장 급박한 것은 우리가 받은 새로운 군사 장비를 가동하는 데 즉각 필요한 탄약과 포탄”이라며 “우리는 필요한 탄약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하루 5천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는데, 이는 유럽의 소국들이 평화 시 1년에 소모하는 양이다.
이에 맞선 러시아는 서방의 전면 제재에도 아직 전쟁 수행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월30일 ‘세계경제전망 업데이트’ 보고서에서 지난해 -2.2% 성장이 추정되는 러시아 경제가 2023년 0.3%, 2024년 2.1%로 플러스 성장으로 반전할 것으로 분석했다.
블룸버그 경제연구소의 1월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는 우랄 원유가가 50달러 이하로 추락하지 않는 ‘3년 동안은 전쟁을 무난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러시아는 서방의 금융제재로 달러·유로로 된 국외 자산이 전면 동결됐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운 3100억위안(450억달러)과 금 등 1200억달러의 보유고를 갖고 있다. 블룸버그는 우랄산 원유 가격이 수출 상한가인 배럴당 60달러를 유지하면, 러시아의 위안화 보유고는 오히려 늘어난다고 예측했다.
지난해 말 이후 협상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은 16일 <파이낸셜 타임스> 회견에서 “러시아가 군사 수단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우크라이나를 무너뜨리지도 못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도 올해 러시아군을 모든 점령지에서 쫓아내기는 아주아주 어렵다”고 말했다. 밀리는 외교의 시간이 흘러갔냐는 질문에는 “봄이 시작되기는 몇주가 남았으나 그 창문은 열리고 닫힌다. 적절한 때에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양쪽 모두 상대를 완전히 쓰러뜨릴 수 없으니 타협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는 양쪽 모두 “자신의 목적에 아주 집착해” 협상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의 저명 언론인 데이비드 이그네이셔스도 지난 1월23일 <워싱턴 포스트> 칼럼에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종전 구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즉,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이 아닌 국방력 강화를 통해 안전보장을 달성하고, 러시아의 크림반도 영유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안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전략소통보좌관을 지낸 올렉시 아레스토비치는 6일 현지 매체 <스트라나>와 한 회견에서 “상황을 반전시키고 점령지를 수복하려면, 나토의 무기로 무장한 약 40만명의 잘 훈련된 군인이 필요하다”며 이는 “가까운 시일에 마련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대안으로 “남북한식 시나리오”를 언급하며 “안전보장을 받은 ‘한국’(한국식 우크라이나)을 세우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엄혹한 현실을 인정해 영토 분단을 받아들이고 남은 지역에 한국처럼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 들어가는 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현실론’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7일 자신의 텔레그램 메시지에서 “‘한국식 시나리오’는 (서방의) 희망사항인 것이 명백하다”면서도 “이는 현장에서 전개되는 현실들을 인정하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16일 영국 <비비시>(BBC) 인터뷰에서 영토를 건 타협의 가능성을 다시 부정했다.
결국 조만간 시작될 대공세의 결과가 양쪽의 현실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양쪽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전쟁은 지금보다 더 긴 장기전을 거쳐서 ‘동결된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 결과는 우크라이나의 ‘사실상의 분단’이고, 최악의 경우 정전합의 없는 ‘불안한 분쟁의 지속’이 될 수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