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의 고스티니 드보르 회의장에서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1주년을 사흘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정 연설에 나서 전쟁의 책임을 미국과 그 동맹들에 돌렸다. 그는 “우리는 평화적 해결을 원하나 서방 국가들이 세력 확장을 원한다”며 “이 전쟁의 책임은 서방 엘리트에게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21일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모스크바에 있는 회의장 고스티니 드보르에서 연방 의원, 군 지휘관, 참전 병사들을 상대로 국정 연설을 했다. 한 시간 이상 이어진 연설 현장엔 정부 고위 관리, 사법부 고위 관계자들, 각 지역 대표, 주요 종교 지도자 등 1천여명의 인사가 참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원했지만, 미국 등 서구의 비협조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군사작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돈바스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길 원했고 모든 것을 했지만, 서방 국가들의 평화에 대한 약속은 사기로 판명됐다”며 “잔인한 거짓말이었고, 그 이면에는 매우 다른 시나리오가 준비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의 결백을 주장하며 “우크라이나는 생물학적 무기와 핵무기를 수집하려 했다”고도 주장했다.
또 전쟁 직전인 2021년 12월에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과 관련한 러시아의 입장을 전달했으나, 서방이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실제 러시아는 그해 12월15일 나토의 확장 금지 등을 뼈대로 한 제안을 했지만, 미국 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서방 세력이 돈바스에서 ‘학살’을 준비했으며, 자신들이 2014년 3월 합병한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공격을 꾀했다고도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 등을 거듭 비판하며 앞으로도 ‘나치의 위협’에 대한 ‘방어’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과 그 동맹들이 끝없는 권력을 찾고 있다”며 “서방이 나토를 확대하고 우크라이나를 우산으로 감싸준다. 전쟁에 책임이 있는 것은 그들이고 우리는 전쟁을 막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러시아는 거대한 손실을 보았지만, 올해 봄 새로운 방어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2월 이번 침공의 명분으로 이 지역의 ‘탈나치화’를 내세우며, 우크라이나 주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에 있는 고스티니 드보르 회의장에서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러시아 헌법에 따라 이뤄지는 국정 연설은 국가 안보에 대한 전략적 목표를 제시하는 주요 연설이다. 연례행사이지만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엔 이 연설을 생략했다. 그는 2년 만에 재개되는 연설에서 “세계를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키는 복잡한 시기에 연설을 한다. 역사적 사건들이 우리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며 국민들에게 책임감을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전역에 생중계된 이 연설을 “진실은 우리 편에 있다”는 말로 끝냈다.
한편, 러시아는 하루 전인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키이우를 예고 없이 깜짝 방문한 것의 의미를 평가절하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 대변인은 이 방문이 “우리에게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러시아 내부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당연히 이를 주의 깊게 지켜봤다. 폴란드 방문도 유심히 지켜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에 이어 바이든 대통령도 이날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연설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3월 바르샤바에선 푸틴 대통령을 “권좌에 머물러선 안 된다”며 맹비난했다. 전쟁 1년을 맞아 미-러 정상이 ‘맞불 연설’에 나서며 대결이 격화되는 양상이다. 영국 <비비시>(BBC)는 21일 이뤄지는 두 연설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대결과 같은 모양새를 띠게 됐다고 설명했다. 중국 외교 사령탑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이날 러시아에 도착한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우리는 왕 위원과 푸틴 대통령의 만남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