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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핵군축에서 핵경쟁으로…미·중·러 ‘불신의 시대’

등록 2023-02-22 19:46수정 2023-02-23 02:40

푸틴, 신전략무기감축협정 이행 중지 선언
중국까지 가세…미·중·러 ‘3자 대결’ 구도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서방을 비판하는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오른쪽) 같은 날 몇 시간 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 바르샤바 왕궁 정원에서 러시아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 바르샤바/A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서방을 비판하는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오른쪽) 같은 날 몇 시간 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 바르샤바 왕궁 정원에서 러시아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 바르샤바/AP 연합뉴스

“오늘, 나는 확신을 가지고 핵무기 없는 세계의 평화와 안보에 대한 미국의 서약에 대해 분명히 말하려 합니다.”

2009년 4월5일, 오전 10시21분. 체코 프라하의 흐라트차니 광장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인류의 꿈을 역설하는 중요 연설에 나섰다. 핵이란 ‘절대 무기’를 개발하고 사용했던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핵 없는 세계’를 향한 강력한 비전을 제시하자 광장엔 박수와 환호 소리가 넘쳐났다.

그로부터 14년 뒤, 인류는 오바마 대통령이 내세웠던 ‘장밋빛 미래’와는 전혀 다른 ‘엄혹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지난해 2월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인류를 ‘신냉전’의 늪으로 이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각) 2년 만에 나선 국정 연설에서 미-러 사이에 남아 있는 유일한 핵군축 협정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의 이행을 중지하겠다고 밝혔다. 연설 직후 푸틴 대통령은 이 협정의 이행이 포함된 러시아의 외교 지침을 파기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치열한 냉전 대립 속에서도 미·소(러)는 서로를 절멸로 이끌 수 있는 핵전쟁을 막기 위해 중거리핵전력협정(INF·1987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991년) 등 여러 군축 협정을 맺어왔다. 전자를 통해 두 나라는 사거리 500~5500㎞에 이르는 중·단거리 탄도·순항 미사일의 생산·실험·배치를 금지해 유럽의 안보 환경을 극적으로 개선했고, 후자를 통해 실전 배치한 핵탄두와 운반 수단의 수를 제한하며 무모한 핵 경쟁을 막았다. 2011년 2월 발효된 현재 협정에 따르면 두 나라는 실전 배치 전략 핵탄두를 각각 1550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중폭격기 등 3대 핵 운반 수단을 각각 700기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

냉전을 끝낸 이 시대의 정신은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였다. 이 믿음에 따라 양국은 상대의 협정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방문 사찰을 받아들였다. 상호 사찰은 처음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엔 러시아의 비협조로 2020년 3월 이후 3년 동안 재개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내린 ‘무모한 결정’의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러시아 외교부는 21일 장문의 성명에서 “워싱턴의 극도의 적대 감정, 그들이 끌어올리는 대립, 우크라이나 안팎에서 노골적으로 일으키는 악의적인 갈등의 조장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싼 안보 환경이 본질적으로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이 이날 연설에서 밝힌 대로 ‘러시아의 전략적 패배’를 막기 위해 미국의 눈앞에 ‘핵 카드’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폴 울포위츠 전 미국 국방부 부장관은 이날 <뉴욕 타임스>에서 푸틴 대통령의 선언을 “군사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선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러시아 외교부는 2026년 2월까지로 정해진 협정 기한까지 “양적 제한은 엄격히 지키겠다”고 했고, 이 “결정이 뒤집힐 수 있다”며 “미국이 전반적인 긴장 완화를 위한 선의의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 ‘전략적 패배’를 강요하면 안 된다고 요구한 셈이다. 하지만 20일 키이우 ‘깜짝 방문’에서 흔들림 없는 지원을 약속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날 러시아의 결정에 “매우 불행하고 무책임하다”며 분노를 쏟아냈다. 하지만 4년 전 미-러 간의 전략 균형을 유지하던 또 다른 축인 중거리핵전력협정을 일방 파기한 것은 중국의 급격한 군사적 부상을 우려했던 미국이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핵태세 검토 보고서’(NPR)에서 “2030년께 사상 처음 전략적 경쟁자인 두개의 핵 대국과 마주해야 한다”는 우울한 전망을 전하며 이에 맞서겠다고 결의했다. 미국은 러시아를 꺾고 핵탄두를 급격히 늘리는(300여기→1500기) 중국의 도전을 짓누르기 위해 핵 능력을 확장해 나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 결정은 미국·중국·러시아 세 ‘대국’이 본격적인 핵 경쟁으로 들어서는 장기적 변곡점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핵 군축’을 이끈 신뢰의 시대는 가고, 불신과 증오가 지배하는 ‘핵 경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길윤형 기자, 박병수 선임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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