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부 장관(왼쪽)과 스베냐 슐체 경제협력개발부 장관이 1일(현지시각) 수도 베를린에서 여성주의 외교 정책 가이드라인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독일 정부가 1일(현지시각) 외교 관계와 외국 원조 사업에서 성평등과 여성 인권 신장을 주요 목표로 추구하는 내용을 담은 ‘여성주의 외교정책’을 발표했다. 독일은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며 유럽연합(EU) 내 영향력도 큰 나라여서, 이 정책의 여파는 상당할 전망이다.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부 장관은 이날 전세계의 성평등과 여성의 역할 확대를 위해 활동할 여성주의 외교 담당 대사를 신설하는 것 등을 담은 여성주의 외교정책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고 <로이터> 통신 등이 보도했다. 88쪽에 이르는 가이드라인은 외국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에 성인지 개념을 도입하고, 여성과 소수자들이 정치와 경제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며, 기후와 에너지 정책에서도 성평등 문제를 고려하는 것 등을 담고 있다.
가이드라인에는 국제 분쟁 해결 과정에 여성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로비 활동을 강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가이드라인은 독일이 유엔의 평화구축기금을 감독하는 위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여성 참여를 촉진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유럽연합의 외교 정책이 여성 문제에 더 집중하도록 하는 데 적극 나설 것도 밝혔다.
2021년 12월 독일의 첫 여성 외교장관으로 취임한 베어보크 장관은 “우리의 국외 활동이 더 여성적인 모습을 띠게 할 것이고 고위직 중 여성 비율을 높이는 데도 적극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가이드라인 작성에 적극 참여한 스베냐 슐체 경제협력개발부 장관은 “더 평등한 사회일수록 기아과 빈곤이 덜하고 더 안정적”이라며 여성주의 외교 정책의 이점을 강조했다.
독일 정부는 이런 외교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재정을 훨씬 더 체계적으로 성평등 정책에 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이드라인은 120억유로(약 16조7천억원)의 개발기금 중 93%를 성평등을 주요 목표로 하는 사업에 투입하기로 했다. 전체의 8%는 성평등을 목표로 하는 사업에 투입되고, 85%는 성평등을 두번째 목표로 하는 사업에 투자된다.
여성주의 외교정책은 2014년 스웨덴의 마르고트 발스트룀 외교장관이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이 정책은 △여성의 경제 활동 및 정치 참여 확대 △성폭력 대응 △남녀 차별 해소 등을 국제 사회에서 주창하는 걸 핵심으로 삼는다. 특히, 남성들이 주도하는 외교 활동이 국제 분쟁을 줄이는 데 실패했다는 인식에 따라 분쟁 해결 과정에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도 강조한다.
발스트룀 장관은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 인권을 비판했다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의 정책은 차츰 국제적인 호응을 얻었다. 최근 몇년 사이 캐나다·프랑스·멕시코·스페인 등이 이런 기조를 외교 정책에 포함시켰다. 프랑스의 경우, 2018년부터 ‘성평등을 위한 국제 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런 전략의 하나로 2025년까지 대외 지원금의 75%를 성평등 개선에 투입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한편, 여성주의 외교 정책을 처음 주창한 스웨덴에서는 지난해 10월17일 우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책 폐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토비아스 빌스트롬 외교장관은 취임 직후인 18일 “딱지를 붙이게 되면 사안의 실질이 가려지는 경향이 있다”며 “앞으로 ‘여성주의 외교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움직임은 극우 성향 ‘스웨덴민주당’의 지지가 없이는 국정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것이지만, 여성주의 외교 때문에 일부 우방국들과의 관계가 악화됐다는 점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베어보크 장관도 비판을 의식한 듯 “가이드라인은 세상을 개선하고 싶다는 순진한 바람이 담긴 선전 책자가 아니다”며 독일은 다른 나라의 외교 정책에서 이미 많은 것을 배웠다고 지적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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