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리커창(왼쪽) 당시 국무원 총리가 지난해 10월22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 폐막 행사에 참석해 앉아 있다. 베이징/AP 연합뉴스
리커창 전 중국 국무원 총리가 27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8.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은 이날 오전 “리커창 동지에게 26일 갑자기 심장병이 발생했고, 27일 0시10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며 “부고를 곧 낼 것”이라고 전했다. 관영 신화통신은 리 총리의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밝혔다.
리 전 총리는 지난 3월 10년 동안 맡던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관례대로 눈에 띄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한 달 여 전인 9월 초 그가 중국 유명 관광지인 간쑤성 둔황석굴을 방문하는 영상이 일부 소셜미디어(SNS)에 올라왔을 때만 해도, 그는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다.
1955년생으로 안후이성 출신인 리 전 총리는 중국 주요 정치 파벌 중 하나였던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법학과 경제학을 섭렵한 뛰어난 관료로 인정받았다. 최연소 성장 등을 맡으며 승승장구했고, 공청단 출신 선배였던 후진타오 전 주석이 그를 자신에 이은 차기 주석으로 밀기도 했다.
2013년에는 시 주석에 이어 중국 권력 서열 2위이자 거시 경제와 민생을 관리하는 국무원 총리에 오르며 큰 기대를 받았지만, 시 주석의 거대한 권력에 밀려 전임 주룽지 총리나 원자바오 총리보다 존재감이 크지 않은 총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리 전 총리는 문화대혁명(문혁) 기간인 1974년 고교를 졸업한 뒤 농촌으로 하방돼 일했고, 문혁이 끝난 뒤인 1977년 베이징대에 입학해 법학(학사)과 경제학(석·박사)을 공부했다. 10년간 지속된 문혁으로 다수 청년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상황에서 문혁 이후 첫 입시 세대인 리 전 총리는 베이징대 학생회장을 맡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992년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를 맡으며 공청단의 차세대 리더로 떠올랐고, 1999년에는 44살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성장(허난성)을 맡았다. 시 주석보다 유명도가 앞섰던 리 전 총리는 공청단 출신 후진타오 전 주석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차기 중국 최고지도자 후보로 꼽혔지만 파벌 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면서 결국 시 주석에게 패했다.
2007년 17차 당 대회 때 시 주석이 서열 6위의 국가 부주석을 맡고, 리 전 총리가 7위인 국무원 부총리를 맡으면서 후계 경쟁이 사실상 종료됐다. 그를 지지했던 후 전 주석은 지난해 10월 22일 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 폐막식 도중 수행원 손에 이끌려 중도 퇴장당했다. 이 회의에서 시 주석은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돼 ‘시진핑 3기’ 체제의 문을 열었고, 리 전 총리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물러나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았다.
리 전 총리는 시진핑 1기 체제가 출범한 2013년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10년 동안 국무원 총리를 맡으며 중국 거시 경제와 민생 정책을 총괄했다. 그가 총리로 재임하는 기간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2013년 9조5704억달러(1경2921조원)에서 2022년 17조9631억달러(2경4235조원)로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
베이징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큰 기대를 받았지만 기대만큼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 주석이 중국 경제 분야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당 중앙재경영도소조의 조장을 직접 맡는 등 리 전 총리에게 활동할 공간을 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쩌민 전 주석 때부터 총리가 당 중앙재경영도소조의 조장을 맡아왔으나, 시 주석 들어 이런 관례가 깨졌다.
앞서 2007년 랴오닝성 당서기 시절 리 전 총리는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의 대안으로 전기 소모량, 철도 운송량, 은행 대출 증가율 등 3가지 지표를 합친 이른바 ‘커창지수’를 내놨고, 국제적으로 중국 정부의 통계 발표보다 더 높은 신뢰를 받기도 했다.
베이징/최현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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