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16) 타이 선거 관전기
(16) 타이 선거 관전기
“나는 늘 빗속을 걷는 게 좋다. 아무도 내가 우는 걸 볼 수 없으니까.” 웃음 속에 감춰진 절망, 비극에 사로잡힌 희극, 그러나 “사람들의 증오는 사라질 것이고, 독재자는 죽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빼앗았던 권력은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자유 의지는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쳤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오락가락했다.
2월2일 투표가 끝났다. 25년 동안 외신판을 뛰면서 하도 희한한 선거들을 많이 봐왔던 터라 웬만해선 잘 웃지 않는데 이번 타이 선거만큼은 달랐다. 다들 너무 웃겼다. 총리도, 정치인도, 시민도, 네티즌도, 나중에는 취재하던 기자란 놈도 그랬다.
세계 선거사에 총리가 투표 실수한 기록 있을까
투표 반대부터가 웃겼다. ‘국민소풍의 날’이라고 했다. 선거 반대를 외쳐온 민중민주개혁위원회(PDRC)가 투표장 대신 소풍 가자는 구호를 들고나왔다. 지난해 10월 잉락 친나왓 현 과도정부 총리가 이끄는 프아타이당이 2006년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포함한 정치 관련자 전면 사면법을 통과시키자 전 민주당 정부에서 부총리를 지낸 수텝 트악수반이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 퇴진을 외쳤다. 몰린 잉락은 12월9일 의회를 해산한 뒤 2014년 2월2일 조기선거를 선언했다. 수텝은 선거 치우고 민중평의회를 설치하자며 초헌법적 발상으로 맞받아쳤다. 수텝은 민중혁명이라고도 했다. 그게 ‘국민소풍의 날’이 되었다. 근데 수텝이 끄는 민중민주개혁위원회는 소풍만 가지 않았다. 지난 12월 입후보 등록을 방해하더니 이번 선거일에 가까워서는 남부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투표지 운송까지 막았다. 그 결과 선거 당일 전국 9만3952개 투표소 가운데 1만283곳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투표율이 45.84%에 머물렀다. 선거위원회에 따르면 4900만 유권자 가운데 2000만명쯤이 투표했고, 어림잡아 20%에 이르는 800만~1000만명쯤이 국민소풍 방해로 투표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통적인 불참자 1000만명에다 소풍에 참여한 민주당 지지자 1000만명을 빼면 비슷한 숫자가 나오는 셈이다. 소풍치고는 광란이었다. 혁명도 소풍도 분간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온 나라가 휘둘린 꼴이다. 불쾌해도 웃음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총리도 빠지지 않았다. 잉락이 코미디판에 불을 지폈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투표해 달라. 정치 혼란을 극복해낼 유일한 길은 선거뿐”이라며 두어달 가까이 전선을 독려해온 잉락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투표장에 나타나 기자들 앞에서 표정을 챙기더니 정당 명부 투표함에 주황색 표를 지역구 투표함에 자주색 표를 태연히 집어넣었다. 아뿔싸. 거꾸로였다. 물론 투표함에는 서로 다른 투입구가 타이어로 또렷이 적혀 있었다. 선거에 사활을 건 최고사령관이 저지른 실수치고는 지나쳤다. 세계 선거사를 통틀어 지금껏 총리나 대통령이 투표 실수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시민들이 대놓고 ‘바보 총리’라고 낄낄댄들 할 말이 없게 생겼다. 역시 총리는 총리였다.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타이 정치판 풍경을 딱 한 장면으로 상징해냈다. 질 낮은 풍자극을 보면 헛웃음이 나오듯이, 그랬다.
투표하지 말고 소풍 가자며
혁명과 소풍 분간 못하는 자들
심각한 표정으로 투표장 나타나
엉뚱한 투표함에 표 넣은 총리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민주당
해산될 수도 있는 프아타이당
그 사이 젊고 잘생긴 일본 기자는
국민소풍단체와 투표장을 누비며
여성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니
패자가 없다. 승자뿐인 게 이번 선거 특징이다. 이건 처음부터 모두에게 선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선거위원회는 사고 지역구 재선거가 끝날 때까지 투표 결과를 밝힐 수 없다고 했으나 잉락의 프아타이당은 일찌감치 승리를 선언했다. 선거 다음날 프아타이당은 하원 500의석 가운데 지역구 260석과 비례대표 40석을 합해 300석을 얻었다고 밝혔다. 헌법이 요구한 251석을 넘어 제1당으로 차기정부 구성권을 확보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투표 결과를 한 꺼풀만 까보면 프아타이당이 승리를 외칠 만한 거리가 없다. 오히려 프아타이당은 민심 이탈과 의심이라는 중대한 경고장을 받았다. 프아타이당 정부가 사력을 다했던 선거 홍보전이 투표율 45.84%에 그쳤다. 패배다. 2011년 선거 투표율이 73%였다. 그 선거로 집권한 프아타이당은 3년 만에 투표율을 30%나 까먹었다. 국민소풍 반대에 밀렸든 어쨌든 다시 차기정부를 노리는 집권당으로서 한계를 드러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들의 전통 요새인 동북부와 북부에서조차 투표율이 겨우 50%를 조금 웃돌았다는 대목이다. 전국 투표율과 별로 다를 바도 없다. 이 지역들은 지금까지 ‘탁신 패밀리’에게 말뚝표를 박아주었던 곳으로 이번 선거에서 국민소풍 따위와는 아무 상관 없이 자유로운 선거가 이뤄졌다. 심지어 탁신과 잉락의 고향인 치앙마이에서조차 기껏 54.7%가 나왔다. 여기는 지역 라디오 105.50FM을 통해 “(잉락) 총리 보호를 준비하자. 총리가 태어난 고향(치앙마이)으로 돌아와 임시 수도를 설치하고 쿠데타나 방콕 반대자들과 맞서야 한다”는 말까지 내뱉어온 곳이다. 수텝이 떠벌리는 ‘선거 불법성’도 코미디 또 있다. 아직 까보진 않았지만 그 전국 투표율 45.84%도 다가 아니다. 합법적인 무선택표나 반항적인 무효표가 얼마나 나올지도 심각한 대목이다. 2006년 2월 선거에서 ‘탁신 옥빠이’(탁신 꺼져라) 같은 낙서를 한 무효표가 무려 10%나 나왔던 걸 되돌아볼 만하다. 개표 결과에 따라 프아타이당은 의석수와 상관없이 치명타를 입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제1 야당인 민주당이 불참한 이번 선거에서 프아타이당이 거둔 300석이란 건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지뢰밭에 걸려 뒷걸음치면서도 큰소리치는 캄보디아군 연대장을 본 적이 있다. 그때도 비웃었다. 이번처럼. 이미 2006년 4월 선거에서 경험했다. 그 시절 민주당을 비롯한 3개 야당이 불참한 선거에서 탁신의 타이락타이당(프아타이당 전신)은 단 1석을 제외한 전국 지역구를 휩쓸었고 비례대표까지 합해 하원 500석 가운데 459석을 얻었다. 나머지 40석은 타이락타이당 단독 입후보자들이 유효표 20%를 넘지 못해 재선거로 넘어갔다. 이른바 민주제도 아래 치른 선거에서 역사상 최대 승리를 거뒀지만 탁신은 정부 구성에 실패했다. 국왕이 비민주적 선거라는 뜻을 흘리자 헌법재판소가 선거무효 판결을 내린 탓이다. 10월로 새 선거날을 잡았지만 군인들이 9월 쿠데타로 튀어나와 선거도 탁신도 모조리 끝장나버렸다. 바로 여기에 맛을 들인 게 민주당이라는 정당이고 민중민주개혁위원회라는 단체다. 이번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민주당과 그 전위조직 꼴인 민중민주개혁위원회는 승리를 외쳤다. 수텝은 “선거 반대 운동 역사상 최대 성공”이라고 떠벌렸다. 하루 뒤 그 둘은 이번 선거의 불법성을 헌법재판소에 청원하겠다고 밝혔다. 전 총리였던 민주당 대표 아피싯 웨차치와는 헌법 제68조 ‘민주제도를 무너뜨릴 목적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자들 또는 국가통치를 위한 권력 획득이 어떤 수단이든 헌법을 따르지 않는 걸 금지한다’는 규정을 들이댔다. 합법적인 선거를 보이콧한 민주당, 그 정당은 선거 민주제도를 무너뜨릴 목적으로 권리를 행사했다. 합법적인 선거를 반대하고 민중평의회 설치를 요구한 민중민주개혁위원회, 그 단체는 국가통치를 위한 권력 획득 방법이 헌법을 따르지 않았다.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니 나도 웃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민주당은 프아타이당 해산과 그 집행위원들의 자격박탈 건을 헌법재판소에 청원하고 잉락을 비롯한 장관들을 독직 혐의로 형사고발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민주당은 이번 선거를 한날 치르지 못한 것도 위법이라며 이미 옴브즈맨 오피스에 선거무효를 청원한 상태다. 근데 왜 이 자들은 툭하면 죽어라고 선거 반대를 외쳤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2001년 선거에서부터 13년 동안 단 한번도 ‘탁신당’을 이겨본 적이 없었고 이번 선거에서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사이 민주당은 2007년 12월 선거에서 쿠데타 군부의 필사적인 지원을 업고도 탁신당(팔랑쁘라차촌당)한테 233 대 165로 패했으나 1년 뒤 헌법재판소가 그 탁신당 해산 선고를 내리자 군소정당들을 묶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집권했다. 보자. 이미 선거위원회가 사면법 결정 과정에서 총리와 장관들이 개입한 사안과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총리의 권력남용 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위법으로 판정나면 총리뿐 아니라 프아타이당 집행부 전원이 5년짜리 정치규제에 묶이고 당 해산으로 이어진다. 탁신당이 두번이나 겪은 일이다. 그 사법귀신이 정치판에 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민주당과 민중민주개혁위원회가 승리를 외치는 까닭이다. 너무 뻔해도 웃음이 나는 모양이다. 굳이 꼽으라면 이번 선거 최대 승리자는 따로 있다. 에나미 다이지로라는 젊고 잘생긴 일본 <후지티브이> 기자다. 이자는 앞뒤에 프레스(Press)와 티브이(TV)를 대문짝만하게 박은 방탄조끼를 입고 국민소풍 단체와 투표장을 누비며 여성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성팬들과 취재 현장에서 찍은 기념사진에다 “방탄조끼를 벗어라. 내 몸으로 보호해주고 싶다” “내가 꿈꾸던 남자친구” “지상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같은 글들이 소셜네트워크를 순식간에 도배했다. 하룻밤 사이에 이자는 발가벗겨졌다. 생년월일, 고향, 고등학교 시절 희망, 대학, 취향, 취미에다 혈액형까지 모조리 떴다. 물먹은 언론도 뒤늦게 뛰어들어 흥을 돋웠다. 과연 소셜네트워크 위력은 대단했다. 선거 이야기는 이 한방으로 끝장났다. 전쟁지역도 아닌데 웬 방탄조끼와 헬멧? 기자 태도야 여기서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지만 한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총알이 날아다니지 않는 현장에서 방탄조끼와 헬멧을 걸치고 보도를 한다는 건 이미 그림으로 오보를 낸 셈이다. 시청자들이 기자의 말보다 행색을 보고 상황을 먼저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방송기자들이 조심해야 할 대목이다. 그래서 경험 많은 기자들은 아무리 위험한 전쟁터에서도 방탄조끼 따위를 걸치지 않는다. 정신 차리고 보면 방탄조끼 하나에도 그렇게 깊은 사연들이 있었다. 아무튼 <후지티브이> 기자가 원했든 어쨌든 그 결과는 기자가 취재 대상인 현실에 개입한 꼴이 돼버렸다. 이젠 외국 기자까지 덩달아 나서 남의 나라 선거판을 코미디로 만들어놓는 세상인가 보다. 거북한 웃음도 웃음이었다. 웃다 보니 불길하고 뻔한 시나리오가 자꾸 떠오른다. 국민소풍의 날은 2월23일 재선거 때도 이어질 것이고, 잉락은 6개월 동안 새 정부를 구성하기 힘들 것이고, 친탁신-반탁신은 계속 충돌할 것이고, 군부는 치안을 빌미로 움직일 것이고, 헌법재판소는 선거무효 판결에 이어 프아타이당 해산 명령을 내릴 것이고, 결국 ‘국가개혁위원회’ 같은 이름을 단 초헌법적 기구가 등장해 정부를 대신할 것이고, 또 싸울 것이고…. 절망감도 웃음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찰리 채플린의 부활을 꿈꾸며.
투표하지 말고 소풍 가자며
혁명과 소풍 분간 못하는 자들
심각한 표정으로 투표장 나타나
엉뚱한 투표함에 표 넣은 총리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민주당
해산될 수도 있는 프아타이당
그 사이 젊고 잘생긴 일본 기자는
국민소풍단체와 투표장을 누비며
여성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니
패자가 없다. 승자뿐인 게 이번 선거 특징이다. 이건 처음부터 모두에게 선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선거위원회는 사고 지역구 재선거가 끝날 때까지 투표 결과를 밝힐 수 없다고 했으나 잉락의 프아타이당은 일찌감치 승리를 선언했다. 선거 다음날 프아타이당은 하원 500의석 가운데 지역구 260석과 비례대표 40석을 합해 300석을 얻었다고 밝혔다. 헌법이 요구한 251석을 넘어 제1당으로 차기정부 구성권을 확보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투표 결과를 한 꺼풀만 까보면 프아타이당이 승리를 외칠 만한 거리가 없다. 오히려 프아타이당은 민심 이탈과 의심이라는 중대한 경고장을 받았다. 프아타이당 정부가 사력을 다했던 선거 홍보전이 투표율 45.84%에 그쳤다. 패배다. 2011년 선거 투표율이 73%였다. 그 선거로 집권한 프아타이당은 3년 만에 투표율을 30%나 까먹었다. 국민소풍 반대에 밀렸든 어쨌든 다시 차기정부를 노리는 집권당으로서 한계를 드러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들의 전통 요새인 동북부와 북부에서조차 투표율이 겨우 50%를 조금 웃돌았다는 대목이다. 전국 투표율과 별로 다를 바도 없다. 이 지역들은 지금까지 ‘탁신 패밀리’에게 말뚝표를 박아주었던 곳으로 이번 선거에서 국민소풍 따위와는 아무 상관 없이 자유로운 선거가 이뤄졌다. 심지어 탁신과 잉락의 고향인 치앙마이에서조차 기껏 54.7%가 나왔다. 여기는 지역 라디오 105.50FM을 통해 “(잉락) 총리 보호를 준비하자. 총리가 태어난 고향(치앙마이)으로 돌아와 임시 수도를 설치하고 쿠데타나 방콕 반대자들과 맞서야 한다”는 말까지 내뱉어온 곳이다. 수텝이 떠벌리는 ‘선거 불법성’도 코미디 또 있다. 아직 까보진 않았지만 그 전국 투표율 45.84%도 다가 아니다. 합법적인 무선택표나 반항적인 무효표가 얼마나 나올지도 심각한 대목이다. 2006년 2월 선거에서 ‘탁신 옥빠이’(탁신 꺼져라) 같은 낙서를 한 무효표가 무려 10%나 나왔던 걸 되돌아볼 만하다. 개표 결과에 따라 프아타이당은 의석수와 상관없이 치명타를 입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제1 야당인 민주당이 불참한 이번 선거에서 프아타이당이 거둔 300석이란 건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지뢰밭에 걸려 뒷걸음치면서도 큰소리치는 캄보디아군 연대장을 본 적이 있다. 그때도 비웃었다. 이번처럼. 이미 2006년 4월 선거에서 경험했다. 그 시절 민주당을 비롯한 3개 야당이 불참한 선거에서 탁신의 타이락타이당(프아타이당 전신)은 단 1석을 제외한 전국 지역구를 휩쓸었고 비례대표까지 합해 하원 500석 가운데 459석을 얻었다. 나머지 40석은 타이락타이당 단독 입후보자들이 유효표 20%를 넘지 못해 재선거로 넘어갔다. 이른바 민주제도 아래 치른 선거에서 역사상 최대 승리를 거뒀지만 탁신은 정부 구성에 실패했다. 국왕이 비민주적 선거라는 뜻을 흘리자 헌법재판소가 선거무효 판결을 내린 탓이다. 10월로 새 선거날을 잡았지만 군인들이 9월 쿠데타로 튀어나와 선거도 탁신도 모조리 끝장나버렸다. 바로 여기에 맛을 들인 게 민주당이라는 정당이고 민중민주개혁위원회라는 단체다. 이번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민주당과 그 전위조직 꼴인 민중민주개혁위원회는 승리를 외쳤다. 수텝은 “선거 반대 운동 역사상 최대 성공”이라고 떠벌렸다. 하루 뒤 그 둘은 이번 선거의 불법성을 헌법재판소에 청원하겠다고 밝혔다. 전 총리였던 민주당 대표 아피싯 웨차치와는 헌법 제68조 ‘민주제도를 무너뜨릴 목적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자들 또는 국가통치를 위한 권력 획득이 어떤 수단이든 헌법을 따르지 않는 걸 금지한다’는 규정을 들이댔다. 합법적인 선거를 보이콧한 민주당, 그 정당은 선거 민주제도를 무너뜨릴 목적으로 권리를 행사했다. 합법적인 선거를 반대하고 민중평의회 설치를 요구한 민중민주개혁위원회, 그 단체는 국가통치를 위한 권력 획득 방법이 헌법을 따르지 않았다.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니 나도 웃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민주당은 프아타이당 해산과 그 집행위원들의 자격박탈 건을 헌법재판소에 청원하고 잉락을 비롯한 장관들을 독직 혐의로 형사고발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민주당은 이번 선거를 한날 치르지 못한 것도 위법이라며 이미 옴브즈맨 오피스에 선거무효를 청원한 상태다. 근데 왜 이 자들은 툭하면 죽어라고 선거 반대를 외쳤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2001년 선거에서부터 13년 동안 단 한번도 ‘탁신당’을 이겨본 적이 없었고 이번 선거에서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사이 민주당은 2007년 12월 선거에서 쿠데타 군부의 필사적인 지원을 업고도 탁신당(팔랑쁘라차촌당)한테 233 대 165로 패했으나 1년 뒤 헌법재판소가 그 탁신당 해산 선고를 내리자 군소정당들을 묶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집권했다. 보자. 이미 선거위원회가 사면법 결정 과정에서 총리와 장관들이 개입한 사안과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총리의 권력남용 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위법으로 판정나면 총리뿐 아니라 프아타이당 집행부 전원이 5년짜리 정치규제에 묶이고 당 해산으로 이어진다. 탁신당이 두번이나 겪은 일이다. 그 사법귀신이 정치판에 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민주당과 민중민주개혁위원회가 승리를 외치는 까닭이다. 너무 뻔해도 웃음이 나는 모양이다. 굳이 꼽으라면 이번 선거 최대 승리자는 따로 있다. 에나미 다이지로라는 젊고 잘생긴 일본 <후지티브이> 기자다. 이자는 앞뒤에 프레스(Press)와 티브이(TV)를 대문짝만하게 박은 방탄조끼를 입고 국민소풍 단체와 투표장을 누비며 여성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성팬들과 취재 현장에서 찍은 기념사진에다 “방탄조끼를 벗어라. 내 몸으로 보호해주고 싶다” “내가 꿈꾸던 남자친구” “지상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같은 글들이 소셜네트워크를 순식간에 도배했다. 하룻밤 사이에 이자는 발가벗겨졌다. 생년월일, 고향, 고등학교 시절 희망, 대학, 취향, 취미에다 혈액형까지 모조리 떴다. 물먹은 언론도 뒤늦게 뛰어들어 흥을 돋웠다. 과연 소셜네트워크 위력은 대단했다. 선거 이야기는 이 한방으로 끝장났다. 전쟁지역도 아닌데 웬 방탄조끼와 헬멧? 기자 태도야 여기서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지만 한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총알이 날아다니지 않는 현장에서 방탄조끼와 헬멧을 걸치고 보도를 한다는 건 이미 그림으로 오보를 낸 셈이다. 시청자들이 기자의 말보다 행색을 보고 상황을 먼저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방송기자들이 조심해야 할 대목이다. 그래서 경험 많은 기자들은 아무리 위험한 전쟁터에서도 방탄조끼 따위를 걸치지 않는다. 정신 차리고 보면 방탄조끼 하나에도 그렇게 깊은 사연들이 있었다. 아무튼 <후지티브이> 기자가 원했든 어쨌든 그 결과는 기자가 취재 대상인 현실에 개입한 꼴이 돼버렸다. 이젠 외국 기자까지 덩달아 나서 남의 나라 선거판을 코미디로 만들어놓는 세상인가 보다. 거북한 웃음도 웃음이었다. 웃다 보니 불길하고 뻔한 시나리오가 자꾸 떠오른다. 국민소풍의 날은 2월23일 재선거 때도 이어질 것이고, 잉락은 6개월 동안 새 정부를 구성하기 힘들 것이고, 친탁신-반탁신은 계속 충돌할 것이고, 군부는 치안을 빌미로 움직일 것이고, 헌법재판소는 선거무효 판결에 이어 프아타이당 해산 명령을 내릴 것이고, 결국 ‘국가개혁위원회’ 같은 이름을 단 초헌법적 기구가 등장해 정부를 대신할 것이고, 또 싸울 것이고…. 절망감도 웃음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찰리 채플린의 부활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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