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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다음 악마’는 러시아다

등록 2014-05-09 19:07수정 2014-05-10 14:21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22) 아슬아슬한 전승기념일
“우리는 용납할 수 없이 잔인하고 거만한 나치의 계획과 온 세상 지배를 파헤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을 늘 기억할 것이다. … 우리 군인들이 조국 수호에 아낌없이 몸을 던져 독립과 자유를 지켜냈고 유럽을 해방시키며 승리를 선언한 그 위대함은 몇 세기 동안 이어질 것이다.”

지난해 5월9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대애국전쟁(Great Patriotic War) 승전기념일 연설 가운데 한 토막이다. 푸틴 말마따나 소비에트는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에게 최초로 패전을 안겨준 모스크바전투를 비롯해 872일 동안 300만 웃도는 사상자를 내면서 단일 도시전으론 역사상 최대 희생을 치른 레닌그라드전투 같은 동부전선을 승리로 이끌면서 제2차 세계대전 종식에 중대한 몫을 했다. 소비에트는 그 과정에서 총인구 1억6천만명의 무려 17%에 이르는 2800만 웃도는 희생자를 내면서 기어이 독일군을 굴복시켰고, 그 무렵 독일한테 모조리 나가떨어졌던 유럽 사회는 그 소비에트에 큰 빚을 진 것도 다 사실이다.

69년 전 5월8일 밤 독일은 베를린에서 러시아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을 비롯한 연합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1945년 유럽전선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유럽한텐 그 5월8일이 유럽승전일(V-E Day)이 되었지만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 시차가 나는 러시아와 옛 소비에트연방은 하루 뒤인 9일을 승전일로 삼았다. 다만 연합국의 한 축이었던 미국은 그게 5월8일이든 9일이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참전했던, 흔히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더 잘 알려진 오버로드작전(Operation Overlord) 기념일인 6월6일을 더 쳐왔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가 오롯이 자신들의 공이라는 속뜻을 강하게 담은 미국식 역사 제조법이었던 셈이다.

독일군에 처음 패전 안겨준
모스크바전투 등으로 기어이
독일을 항복하게 만든 소비에트
올해 승전일인 그 5월9일은
우크라이나 사태의 중대 기점

국제전략문제 전문가라는 자들은
미국과 나토가 대러시아 전쟁에
돌입했다는 사실은 감춘 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5월에
침공한다는 설만 퍼뜨리고 있다

당시 희생자 700만명 냈던 우크라이나

서울과 모스크바의 시차 때문에 금요일 오전 마감을 앞둔 이번 칼럼에서 올해 러시아의 승전기념일 행사와 푸틴의 연설을 미리 볼 순 없지만 해마다 그랬듯이 크레믈(크렘린)궁 벽엔 5월9일 상징물들이 나붙을 것이고, 탱크와 군악대를 앞세운 군인들이 붉은광장(Red Square)을 뒤덮고 전폭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축하 비행을 하던 풍경만은 변하지 않을 듯싶다. 모스크바뿐 아니라 러시아의 크고 작은 도시들과 옛 소비에트 15개 연방들이 벌일 잔치판도 눈에 선하다. 푸틴은 전통에 따라 100그램짜리 보드카(제2차 세계대전 때 군인들에게 지급했던 하루치)를 노병들과 함께 들이켜며 지난해처럼 “당신들이 사악한 적을 무찔렀다. 당신들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왔다”며 덕담을 나눌 것이다. 다만, 짐작하건대 지난 5일 이른바 나치회복 금지법에 서명한 푸틴은 반나치를 앞세워 강력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살포하면서 우크라이나 상황을 낀 대외 강경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내전 위기에 빠진 우크라이나 쪽도 눈여겨볼 만하다. 우크라이나는 이미 소비에트연방에서 벗어났지만 지금껏 5월9일을 승전일로 기려왔다. 그러나 반러시아파와 친러시아파로 갈려 충돌 중인 올해 승전일 기념식은 예전 같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도 키예프 쪽 반러시아 극우 정부는 며칠 전까지도 구체적인 행사 계획을 내놓지 않아 올해 기념식이 형식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반대쪽 친러시아계가 장악한 크림(크리미아)반도나 동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더 떠들썩한 잔치를 벌이지 않을까 싶다. 여긴 우크라이나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 담겨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노린 극우파들의 친나치 전선과 소비에트군의 반나치 전선이 함께 펼쳐졌고 그 결과 700만에 이르는 희생자를 내면서 소비에트연방 가운데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 두 전선이 바로 우크라이나 정치판에 스며들어 오늘까지 이어지는 혼란의 젖줄 노릇을 해왔다.

어쨌든 올해 승전일은 러시아한테도 우크라이나한테도 중대한 기점이 될 듯싶다. 지난 2일 오데사에서 친러시아 시위대 46명(비공식 116명)이 반러시아 시위대에 살해당한 데 이어 5일에는 슬라뱐스크에서 친러시아 민병대 30여명이 우크라이나 정부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사망하면서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은 이미 내전 위기로 치닫고 있다. 비록 7일 푸틴이 자제를 요청했지만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은 11일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우기고, 우크라이나 정부도 25일로 잡아둔 대통령선거 강행 의지를 밝혀 충돌 지점이 켜켜이 쌓여 있다. 게다가 크림반도 사태 뒤 대러시아 경제제재 수위를 더 높이겠다고 압박해 온 미국과 유럽연합이 우크라이나 정부한테 약속했던 국제통화기금(IMF) 지원금 180억달러 가운데 50억달러를 이번 5월에 퍼부을 것으로 알려지면서 내전 격화를 염려하는 소리들이 높아가고도 있다. 이건 지난 4월13일 미국 중앙정보국 국장 존 브레넌이 키예프를 극비리에 방문한 데 이어 4월21일 미국 부통령 조 바이든이 다시 키예프를 방문한 뒤 우크라이나 정부가 친러시아 시위대를 향해 즉각 군사작전에 돌입했던 사실과 연장선에서 눈여겨봐둘 만하다.

오데사 학살사건은 어떻게 일어났나

이 대목에서 다시 끌고 나와야 할 용어가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지난 2월18일부터 23일까지 5일 동안 반정부 시위대와 정부가 충돌해 100여명 희생자와 1천여명 부상자를 낸 끝에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쫓겨나자 러시아는 ‘쿠데타’라 불렀고 미국과 유럽은 ‘혁명’이라 불렀다. 이 두 상이한 용어가 바로 현재 우크라이나 정치 상황을 읽는 중요한 잣대다. 앞서 경제 실정에 허덕이던 야누코비치 정부는 자금 조달을 위해 유럽연합과 러시아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 과정에서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와 관계 단절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유럽연합 대신 러시아와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국과 유럽의 눈 밖에 났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쫓겨났고 대신 미국과 유럽이 지원하는 극우 민족주의 스보보다(자유)당(Svoboda Party)과 네오나치 라이트 섹터(Right Sector)가 판치는 가운데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대통령이 현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다. 물론 러시아 정부는 처음부터 이 우크라이나 극우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 사태를 비롯해 동부 지역 친러시아 시위의 배후로 러시아 정부를 지목하는 한편 러시아군의 무력 개입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다시 5월7일 푸틴으로 넘어가 보자. 푸틴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디디에 부르칼테르 스위스 대통령 겸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의장을 만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다는 우리 유럽 파트너들 생각은 근거 없는 계략일 뿐이다. 그이들은 늘 막다른 상황에 몰아놓고는 모스크바가 해결책을 쥐고 있다며 모든 책임을 우리한테 떠넘긴다”고 불만을 털어놓은 뒤 “우리 군대는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철수했고 훈련장에서 일상적인 훈련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건 모든 걸 볼 수 있는 우주(위성)를 비롯한 현대 정보 기술로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며 군사개입설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앞선 4월30일 미국과 나토는 이미 러시아를 상대로 군사작전에 돌입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투기 8대를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파견한 데 이어 캐나다가 CF-18 호닛 전투기 6대와 수백 병력을 실은 C-17 수송기를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루마니아로 파견했다. 덴마크는 전투기 4대를 에스토니아에 파견했다. 미군 600명도 에스토니아에 도착했다. 5월1일 나토 부사무총장 알렉산더 버시바우는 “러시아가 나토를 적으로 선언했으니 우리는 러시아를 동반자로보다는 적으로 보기 시작해야 한다”며 러시아를 직접 겨냥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4월30일~5월1일 이틀 동안 수도 키예프 도심에서 특수 전술 훈련을 벌이며 맞장구쳤다. 바로 다음날 오데사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시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돌면서 중국을 목적타로 삼은 아시아-태평양 추축전략(Strategic Pivot)을 공고히 다지는 한편 우크라이나 위기를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탓으로 돌리며 대러시아 공동전선을 끌어냈다. 5월5일 미국 태평양 공군사령관 허버트 칼라일은 TU-95 러시아 전략폭격기들의 동북아시아 초계비행이 크게 늘었다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크림에서 하는 짓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며 오바마의 뒤를 받쳤다.

그 전쟁 이익은 IMF 통해 미국의 주머니로

미국이 러시아-중국을 잇는 광활한 유라시아의 관문 격인 흑해라는 전략요충지로 우크라이나를 주목했다는 뜻이다. 미국이 2000년대 들어 체코, 폴란드, 루마니아를 비롯한 옛 소비에트 동맹국뿐 아니라 소비에트연방이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까지 끌어들여 나토의 몸집을 불려온 까닭이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해 드러난 셈이다. 미국이 중국의 잠재적 동맹국인 러시아를 압박·봉쇄하면서 궁극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키겠다는 중국포위(encircle China) 전략의 감춰진 한 유형이었다. 왜 그동안 미국과 나토가 28개 회원국에다 스위스와 스웨덴 같은 22개국이 참여한 유럽대서양동맹위원회(EAPC),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비롯한 7개국을 낀 지중해대화상대국(MDP), 쿠웨이트와 3개국을 포함한 이스탄불협력이니셔티브(ICI), 세계 전역 동맹국으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8개국을 포함한 69개 동맹국을 거느려 왔는지 잘 드러났다.

달리 2008년부터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는 미국을 굴려가기 위해 새로운 전쟁이 필요하다는 오바마의 속셈도 함께 탄로났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건 미국의 사기성 협박사업, 바로 코보소전쟁이었고 이라크 침공이었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었고 리비아 침공이었다. 그 전쟁들은 모두 인종학살, 대량살상무기, 테러리즘 같은 거짓말을 내걸었다. 그 전쟁들은 모두 나토를 앞세웠다. 그리고 그 전쟁들은 모두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 미국의 이문으로 되돌아갔다. 왜 그동안 미국과 나토 회원국 28개 나라가 세계 일년 총군사비 1540조원의 3분의 2에 이르는 1천조원 웃도는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 왔는지 잘 드러났다. 이 나토의 군사비는 러시아 정부 1년 총예산의 두 배를 웃돈다.

그 전쟁들은 밀로셰비치, 사담 후세인, 알카에다, 카다피라는 ‘악마’들을 필요로 했다. ‘러시안 파시스트’ ‘러시안 히틀러’ ‘러시안 나치오날리스트(Nazionalist)’, 모두 미국과 국제언론들이 푸틴에게 붙여 놓은 별명들이다. 그 언론들은 지금 오히려 러시아의 팽창주의, 러시아의 호전주의를 연일 때려대고 있다. 국제전략문제 전문가란 자들은 이미 미국과 나토가 대러시아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감춘 채 저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5월 침공설만을 퍼뜨리고 있다.

러시아의 69주년 승전기념일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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