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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피스보트 7신] 수에즈운하를 지나며

등록 2005-10-19 14:08수정 2005-10-19 14:26

피스보트 세계를 가다-정인환·이정용 기자
피스보트 세계를 가다-정인환·이정용 기자
두 대륙은 떨어진 것도 붙은 것도 아니었다

<한겨레> 이정용(사진부)·정인환(정치부) 기자는 세계 각국의 시민운동가 등 1052명과 함께 ‘피스보트’(토파즈호)를 타고 105일간 세계일주를 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이번 51차 피스보트 주제)를 모색한다.

지난 3일 시작된 일본 평화단체 피스보트의 51번째 항해는 요코하마에서 출항해 앞으로 105일 동안 아시아-아프리카-유럽-라틴아메리카-남태평양 항로를 따라 세계를 일주한다.

5일 아침 피스보트 월드크루즈 호가 수에즈운화를 통과하는 동안 승객들이 갑판에 나와 수에즈운하 옆으로 보이는 이집트 지역을 구경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5일 아침 피스보트 월드크루즈 호가 수에즈운화를 통과하는 동안 승객들이 갑판에 나와 수에즈운하 옆으로 보이는 이집트 지역을 구경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두 대륙은 떨어진 것도 붙은 것도 아니었다

아프리카 대륙과 시나이 반도 사이 구발 해협에 들어서면서 바다가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한다. 4일 오후 들어서면서 토파즈호가 나아가는 방향에서 서쪽 수평선으로 이집트 땅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근해에 들어섰기 때문인지 바람이 제법 거세다. 파도가 연신 뱃머리를 세차게 때려댄다. 물길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예정시간보다 이른 5일 새벽 1시30분께(현지시각) 수에즈만에 도착한 토파즈호는 육중한 닻을 내린 채 여명을 기다렸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상선들이 수에즈만 주변에서 대륙과 대륙 사이를 지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닻을 끌어 올린 피스보트가 천천히 운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소형 선박 1대가 쏜 살처럼 경광등을 반짝이며 토파즈호 곁으로 다가왔다. 운하 경찰용 선박이다. 진행방향을 일치시키기 위해 익숙한 솜씨로 360°를 회전한 경찰선에서 한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서둘러 피스보트에 오른다. 수에즈 운하 통과를 안내할 ‘파일럿’이다.

대륙과 대륙을 지나는 수에즈운하 통과 앞서 경찰선에서 사다리로 승선

이날 오전 6시55분께 피스보트는 드디어 수에즈 운하로 들어섰다. 두 차례 힘찬 뱃고동 소리를 내며 운하 진입을 알리는 게 전통이었다는데, 이날은 조용히 함교방송만 흘러나왔다.

“신사숙녀 여러분, 우리 배는 이제 막 수에즈 운하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북쪽 방면으로 운하를 통과하는 8번째로 배로 지정됐습니다. 지금 갑판에 나오시면, 운하를 통과하는 장관을 목격하실 수 있습니다.”

안내방송이 나오기 전부터 뱃머리 갑판은 수에즈 통과를 기념하기 위해 새벽 잠을 설친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흥분한 일부 승객들은 갑판 난간을 타고 오르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다가 안전요원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나일강 하구 평야지대와 시나이 반도의 낮은 구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나뉘는 곳, 홍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이곳이 바로 수에즈 운하다.

대양을 떠다니다 운하에 들어서니 모든 것이 낯설다. 눈 앞에는 손에 잡힐 듯 육지가 다가서 있다. 거대한 배들이 육지와 육지 사이를 지나고 있다. 마치 내륙의 강물 위를 헤쳐나가는 유람선에라도 탄 듯 하다.
5일 아침 피스보트 월드크루즈 호가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동안 초소에서 보초를 서던 이집트 병사들이 승객들에게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5일 아침 피스보트 월드크루즈 호가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동안 초소에서 보초를 서던 이집트 병사들이 승객들에게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운하 들머리를 지나자 이슬람 성지인 메카로 가는 순례여행 출발지로 이름난 포트 데이비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육지에 있는 이슬람 사원은 배에서 문을 열고 곧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가까이 붙어서 있다. ‘홍해 호텔’이라고 쓰인 건물의 간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야자수 뒷편 모래 언덕 위에 지어진 초소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함교에 올랐다. 태양은 그 새 제자리를 찾아 성큼 하늘의 계단을 올라가 있었다. 저 멀리 서쪽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암갈색 준령은 아타카산이다. 맞은편으로 사막에 다름아닌 시나이 반도의 황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물 위에 띄엄띄엄 띄워져 있는 표시물은 운하로 인도하는 차선이다. 운하 위에 건설된 골리앗 크레인을 비집고 거대한 컨테이너선이 들어가 있는 모습이 흥미롭다.
5일 오전 피스보트 월드크루즈호 앞에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파나마소속 화물선의 낮은 물길을 헤치며 나아가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5일 오전 피스보트 월드크루즈호 앞에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파나마소속 화물선의 낮은 물길을 헤치며 나아가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배에서 문을 열면 곧바로 들어갈 것 같이 붙어 있는 운하 옆 사원

좁다란 운하가 점차 넓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물길이 넓어졌다. 리틀 비터 호수다. 조금 더 나아가자 호수가 더욱 넓어진다.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접어든 것이다. 잇따라 왼편으로 이집트 공군기지와 공항이 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호수로 접어들면서 수많은 선박들이 운하 전역에 흩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포트 사이드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배들이 수에즈 만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배들이 운하를 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호수는 거대한 선박용 주차장처럼 보였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왔을 컨테이너를 7~8층으로 쌓아올린 화물선들이 운하 통과 차례를 기다리며 호수 곳곳에 정박해 있었다. 돛을 단 소형 무동력선을 탄 어부들이 아슬아슬하게 거대한 화물선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고기 잡이를 하고 있었다.

이날 낮 12시40분께 운하 중간지점에 있는 도시 이스마일리아를 지났다. 저 멀리 흰 건물이 수에즈운하관리위원회다. 수에즈만에서 북쪽으로 정확히 80㎞를 거슬러 올라왔고, 지중해와 만나는 포트 사이드까지도 딱 80㎞가 남았다.
5일 아침  피스보트 월드크루즈호가 수에즈운하 들머리에 들어서자 이슬람 성지인 메카로 가는 순례여행 출발지로 이름난 포트 데이비드에 있는 이슬람 사원이 가까이 보인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5일 아침 피스보트 월드크루즈호가 수에즈운하 들머리에 들어서자 이슬람 성지인 메카로 가는 순례여행 출발지로 이름난 포트 데이비드에 있는 이슬람 사원이 가까이 보인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1869년 수에즈운하 완공당시엔 수심 6m…수천척 배 침몰

1869년 완공 당시 수에즈 운하의 중심부는 수심이 6m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가 다닐 수 있는 폭도 전체 58m 가운데 중앙부 22m에 불과했기 때문에 물길을 잘못 들어선 배가 침몰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개통 초기인 1870~84년 사이에만 3천여척의 배가 수에즈를 건너다 침몰한 것으로 전해진다. 연간 2만5천여척의 거대 화물선이 대륙과 대륙을 오가는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 때는 온통 사막 뿐이었던 것 같은데….”

한낮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갑판에서 토미하라 겐지(72)가 추억에 잠겨 있다. 꼭 40년 만에 수에즈 운하를 다시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이던 1965년 10월 그는 석 달 여에 걸친 유럽여행을 마치고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요코하마행 범선에 몸을 실었다. 당시엔 수에즈 운하를 타고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지만, 이번엔 남에서 북으로 거슬러 오르고 있다.

은행원이던 아버지의 발령지였던 중국 톈진 일본인 조계에서 태어난 겐지는 1943년 중학교 진학을 위해 도쿄로 귀국했다고 했다. 귀국 뒤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일본은 패전했고, 혼란한 상황 속에서 진학이 늦어진 그는 1950년대 후반에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사립 명문 메이지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석유공사에 입사한 그는 전도 양양한 젊은이였다.

“한동안 회사생활에 열심을 냈지만, 판에 박힌 일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만, 막상 회사를 그만두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유럽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고 생각하게 됐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잇는 새 다리 등장 ‘무바라크 평화교’ 작명 유감

귀국 뒤 그는 열 달여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겐지는 “대학을 갓 졸업한 우수한 젊은이들이 넘쳐 나는 상황에서 ‘해외 여행 가려고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 둔 어리석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는 회사는 없었다”고 말했다. 취업을 포기하려는 순간 그는 영자신문에서 눈에 띄는 구인광고를 발견했다. 그저 ‘다국적 기업’이라는 말 뿐 회사에 대한 소개가 전혀 없었다.

“입사원서를 제출했더니, 곧바로 면접 날짜를 잡아 알려왔다. 회사 정체를 몰라 조금 미심쩍었지만 오랜 만에 서류전형을 통과한 김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간 회사는 아이비엠(IBM)이었고, 그는 그곳에서 정년을 마쳤다고 한다. 열기로 붉어진 얼굴로 겐조는 “그 때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여행을 떠난 것이 내 인생을 바꿔놓은 셈”이라며 웃었다.
피스보트 월드크루즈호 갑판에서 40년 전의 추억을 회상하는 토미하라 겐지.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피스보트 월드크루즈호 갑판에서 40년 전의 추억을 회상하는 토미하라 겐지.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무바라크 평화교’의 웅장한 모습이 장관이다. 높이만 140m에 이른다는 이 다리의 교각은 고대의 오벨리스크 형상을 하고 있다. 약 250만~650만년 전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었으나, 지각의 변화와 함께 시나이 반도와 홍해를 만들어 내며 갈라 섰다고 전해진다. 태고적 떨어진 두 대륙을 다시 하나로 이어낸 기특한 다리 이름으로 현직 대통령을 등장시킨 것이 고약하다.

해가 진 뒤 수평선의 붉은 빛이 더욱 짙어질 즈음 토파즈호는 수에즈를 빠져 나왔다. 시계는 막 6시40분을 지나고 있다. 운하에 진입한 지 12시간 여 만에 피스보트는 지중해의 첫 정박지 포트 사이드에 닻을 내렸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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