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각)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열린 유세에서 사실상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손을 번쩍 들어올리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처음으로 지원 유세를 했다. 샬럿/EPA 연합뉴스
‘힐러리 클린턴의 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날 연속 드라마의 조연에 가까웠다. 진짜 주인공은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장관 재직 시절 개인 서버를 사용해 논란이 됐던 ‘이메일 스캔들’ 사건의 조사결과를 발표한 제임스 코미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 그리고 클린턴 지원 유세를 첫 출격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코미 국장은 5일(현지시각) 이메일 스캔들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클린턴 전 장관과 그녀의 동료들이 비밀로 분류된 정보를 다루면서 의도적으로 법을 위반했다는 분명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떠한 기소도 부절적하다는 우리의 의견을 법무부에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소권을 가진 법무부의 로레타 린치 장관이 지난주 말, 연방수사국의 수사결과를 전적으로 존중하겠다고 밝힌 만큼, 클린턴이 형사재판에 넘겨질 가능성은 사라졌다. 최소한 법률적으로는 클린턴에 면죄부를 줬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지난해 3월 <뉴욕 타임스>의 보도로 불거진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은 법률적으로는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코미 국장의 발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클린턴이 개인 이메일 서버로 송수신한 이메일 가운데 모두 110건이 당시에도 1급 등의 비밀정보를 포함하고 있었다며, “클린턴과 동료들이 아주 민감하고, 고도의 기밀로 분류된 정보를 취급하면서 극도로 부주의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국무장관의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기밀화되지 않은 시스템은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며 클린턴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또 “클린턴이 적들의 영토에서 업무 관련 이메일을 주고받는 등 미국 밖에서도 개인 이메일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며 적대적인 외국 정부들이 클린턴의 개인 이메일 계정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코미 국장의 이런 평가는 클린턴의 국가안보에 대한 민감성과 판단력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형사적으로는 사건이 종결됐지만, 여론의 장에 다시 공을 넘김으로써 클린턴을 더 궁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시엔엔>(CNN) 방송은 이날 “법무장관에 불기소를 권고하는 사안에 대해 연방수사국장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라며 “(코미 국장이) 날카로운 ‘구두 기소’를 했다”고 지적했다. 코미 국장의 ‘대쪽 원칙주의자’ 모습이 되레 부각되는 모양새다.
클린턴은 이메일 스캔들로 대선 본선 경쟁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의 공세에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밤 트럼프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에서 벌인 유세를 통해 “적들이 거짓말쟁이 클린턴의 파일을 갈취했을지도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클린턴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신뢰성의 위기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코미 국장의 수사 결과 발표 두시간여 뒤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고 격전지인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첫 공동유세에 나섰다. 두 사람은 비행기 안에서 잡담을 하며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려 애썼다. 임기말에도 50%가 넘는 지지율을 자랑하는 오바마가 클린턴에게 주는 최고의 정치적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날 유세 연단에서 오바마와 클린턴은 조연과 주연이 뒤바뀐 형국이었다. 오바마가 주연, 클린턴은 조연인 셈이다. 흑인,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과 젊은층에 대한 오바마의 흡인력을 등에 업지 않으면, 클린턴의 홀로서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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