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46) 살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경찰이 22일 추가로 북한 국적 용의자 2명의 신원을 공개하면서, 이번 사건에 연루된 북한 국적 용의자는 모두 8명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44)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이 북한대사관에 은신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말레이시아 고위 관리를 인용해 “현광성이 전체 음모의 감독자다. 그의 역할은 음모의 이행을 감독하고 대사에게 보고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경찰은 범행 직후 출국해 북한에 간 남성 용의자 4명이 해외에서 범행계획을 세우고 여성 용의자 2명을 끌어들여 예행연습을 시킨 뒤, 말레이시아에 입국해 현지 북한인들의 도움을 받아 범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 인도네시아가 거점이었나? 할릿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이날 여성 용의자인 도안티흐엉(29)과 시티 아이샤(25)가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에 따라 김정남을 공격했다고 밝혔다. 그는 “범행 당시 (출국한) 4명의 남성 용의자가 액체를 전달했고, 여성 용의자들은 이를 맨손에 묻혀 사망자의 얼굴에 바른 뒤, 두 손을 든 채 화장실로 갔다”며 “장난으로 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흐엉과 아이샤는 경찰 체포 뒤 “몰래카메라 장난 동영상을 찍는 줄 알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여성 용의자들이 사건 한달여 전부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예행연습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22일 보도했다. 이 매체는 아이샤의 올케인 말라(25)를 인용해 “아이샤가 (범행 3주 전인) 1월22일 자카르타에서 80㎞ 떨어진 친정에 찾아왔는데, 당시 ‘자카르타에서 장난 몰래카메라 프로그램 촬영이 있다. 상사한테 숙박비를 받았지만, 호텔비가 비싸 친정에 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정남 피살 소식이 알려진 뒤 ‘자카르타에 있는 북한 식당이 북한 정찰총국의 해외 공작 활동을 위한 근거지로 쓰였다’는 현지 매체 보도가 연이어 나오자, 인도네시아 경찰은 “북한 식당의 운영자와 면허에 대해 수사를 시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공작 활동을 하던 북한 남성 용의자 4명이 해외에서 범행을 기획하고 두 외국인 여성을 끌어들여 범행 연습을 시킨 뒤, 1월말~2월초께 각각 말레이시아로 입국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범행 하루 전인 12일에는 공항에서 리허설을 하기도 했다.
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경찰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할릿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이 용의자들의 사진이 나오는 화면을 가리키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쿠알라룸푸르/EPA 연합뉴스
■ 현지 북한인들은 조력자? 남성 용의자 4명은 말레이시아에서 대사관 관계자, 항공사 직원, 무역일꾼 등 현지 북한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북한 정부기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협력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구체적 역할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현광성 2등 서기관도 외교관 신분으로 대사관에 공식적인 적을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해외에 파견된 공작원일 가능성이 있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이날 공개한 현광성, 김욱일의 사진도 모두 범행 당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의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찍힌 모습으로 보여, 이들이 범행 현장 가까이에 있었거나 이들을 데려다주는 등 범행의 조력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레이시아 고위 관리는 <텔레그래프>에 “(고려항공 직원인) 김욱일이 공항에서 남성 용의자 4명을 도왔다”고 전했다. 일본 <교도통신>은 리정철에 대해 “4명의 용의자가 머물 호텔을 알아보고, 운전기사 역할을 하는 등 잡무를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한 바 있다.
북한 당국의 조직적 개입 정황이 점점 짙어짐에 따라, 북한이 북한에 있는 용의자 4명의 신병을 인도하는 것은 물론 대사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현광성과 김욱일에 대한 조사를 허용할 것으로 보긴 힘들다. 따라서 경찰 수사가 계속 진행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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