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망받는 학자, 평론가에서
천안문 시위 거치며 민주화운동가로
수없는 탄압 속에서도 중국 떠나지 않고
끝까지 민주화 요구하다 감옥서 노벨평화상
간암 말기 가석방된 뒤 감시 속 죽음
천안문 시위 거치며 민주화운동가로
수없는 탄압 속에서도 중국 떠나지 않고
끝까지 민주화 요구하다 감옥서 노벨평화상
간암 말기 가석방된 뒤 감시 속 죽음
13일 중국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민주화운동의 상징 류샤오보가 세상을 떠났다.
류샤오보는 13일 오후 5시35분 아내 류샤, 형 류샤오광, 동생 류샤오쉬안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아내 류샤에겐 “잘 사시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1938년 나치 수용소에서 숨진 독일 평화주의자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 이어 두 번째로 구금된 상태에서 사망한 노벨상 수상자다.
“나에겐 적이 없다. 나에겐 원한도 없다.”
류샤오보가 평생 강조한 이 말엔 1989년 천안문(톈안먼) 민주화 시위에서 출발해 30년 가까이 수없는 탄압과 고통 속에서도 중국의 억압적 현실을 바꾸기 위한 분투를 멈추지 않은 강력한 ‘저항’ 정신이 담겨 있다. 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지워진 ‘천안문 정신’의 산증인으로 끝까지 천안문의 이상에 충실했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내놨다. 여러 차례 해외로 망명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중국에 남아 뿌리내리고 분투하길 원했다. 그의 죽음은 중국 체제 내에서 민주화 개혁을 꿈꿨던 희망의 종말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1955년 12월 지린성 창춘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문화대혁명(1966~76년) 때 하방(下放·지식인을 농촌 등 노동 현장으로 보냄)돼 건축 노동자로 일했다. 문혁이 끝난 뒤 1977년 지린대 중문과에 입학했고, 베이징사범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리쩌허우에 도전하는 글을 발표하고, 개혁개방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미학, 문화 평론들을 내놓으면서 촉망받는 스타 학자이자, 평론가, 시인으로 떠올랐다. 강연장에는 빈자리 없이 청중이 몰렸고, 해외 대학 강연 요청도 이어졌다.
1989년 봄, 그의 인생도 중국 사회도 큰 전환점을 만났다. 천안문광장에서 민주화와 부정부패 타파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을 때, 미국 컬럼비아대 방문학자였던 그는 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했다. “우리가 지금 학생들과 함께 위험에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이후에 우리는 그들에게 민주를 말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광장에서 그는 무력진압 조짐 속에 분노하고 분열하고 좌절한 학생들을 다독이며 ‘천안문 4군자’의 일원으로 단식투쟁을 했다. 6월3일 밤 군대의 진압이 시작될 때 학생들이 광장에서 나갈 수 있도록 군대와 협상하기도 했다.
진압 이틀 후 ‘반혁명 선전선동죄’로 체포된 그는 강단에서 쫓겨나는 공직 박탈 조처를 당했다. 1995년에는 1년여간 감금됐다가 이듬해 10월 ‘사회질서 교란죄’를 명목으로 다시 3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2008년 그는 지인들과 함께 ‘08헌장’ 작성과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소련의 억압에 반발해 발표한 77헌장을 모델로, 공산당 일당 체제 종식과 다당제 도입, 삼권분립, ‘당의 군대를 국가의 군대로’, 연방제 등 광범위한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애초 300여명의 서명으로 발표된 헌장엔 그 후 8600여명이 서명했다. 류샤오보는 발표 며칠 전 체포됐고, 2009년 12월 ‘국가 전복 선동죄’로 징역 11년이 선고됐다.
2009년 법정에서 발표한 최후진술 ‘나에게는 적이 없다’에서 그는 “증오는 지혜와 양심이 아니다. 적대적 감정은 국가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야만적인 삶을 악화시키고, 사회의 관용과 인간성을 파괴하며, 국가가 자유와 민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고 했다. 그는 천안문 시위 ‘실패’의 원인이 된 당시 학생 지도부의 비민주적 행위 등을 돌아보며, 중국 공산당이 계급투쟁이란 이름으로 적대감과 원한을 통해 통치를 해왔다고 했다. 중국인들이 이를 극복해야만 민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천안문 이후 평생 그가 고심한 주제다.
08헌장과 류샤오보의 사상에 대해서는 중국 개혁파 내에서도 논쟁이 있었다. 중국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론이란 비판도 있었고, 류샤오보가 홍콩 민주체제를 식민통치의 유산으로 보는 등 지나치게 친서구·친미적 주장을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망명 권유를 끝까지 뿌리치고 자신을 희생한 용기는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감옥에 갇혀 있던 그의 시상식 참석은 불허됐다. 류샤오보는 노벨상을 천안문의 희생자들에게 바친다는 소감을 전했다. 시상식에는 ‘빈 의자’만 놓였다. 중국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이유로 노르웨이에 몇년 동안 경제 보복 조처를 취했다.
류샤오보는 5월말 감옥에서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중국 당국은 6월에야 가석방해 선양 소재 병원에서 치료받도록 했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한달 동안에도 외부와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됐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깡마른 모습은 민주화를 실현하려던 희망의 촛불이 사그라지는 상징처럼 보였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13일 밤늦게 류샤오보의 죽음을 짧게 보도했지만, 14일 중국 내에서 관련 소식은 모두 차단됐다. 노벨상 수상 이후 중국 당국은 ‘류샤오보’는 물론 ‘빈 의자’라는 단어까지 차단할 정도로 철저한 검열을 해왔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4일 정례브리핑에서 “중국은 법치국가이고 범죄자를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며, 법치국가에서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 법률을 어기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냉혹한 입장을 내놨다. 이어 “중국은 이 문제와 관련해 다른 나라에 엄정한 교섭을 제기했고 강력한 불만과 결연한 반대를 표한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많은 중국인들에게 류샤오보는 잊힌 인물이지만, 친구와 지인들은 그를 ‘민주화운동의 순교자’로 기리는 성명을 발표하고 추모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중국에선 그에 대한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과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의 갈등이 계속될 것이다. 중국 민주화의 미래도 이 두 움직임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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