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5월27일 ‘납치피해자 즉시일괄귀국을 요구하는 국민대집회’에 출석해 “정상회담을 조기에 실현시키기 위해 내 직할로 고위급 협의를 해 나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 총리관저 제공
한국에서 긴 추석 연휴가 이어지던 지난 9월 말 일본에서 한국도 ‘초미의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매우 흥미로운 보도가 나왔다. 아사히신문이 29일치 1면 머리기사로 북한과 일본이 올봄 동남아시아에서 두차례에 걸쳐 비밀 접촉을 했다는 특종을 쏟아낸 것이다.
신문은 복수의 북-일 관계 소식통을 인용해 일본 정부 당국자가 지난 3월과 5월 두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의 한 도시에서 북한 조선노동당 관계자와 ‘비밀 접촉’을 했다고 보도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다음 부분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올가을께 평양에 정부 고위 당국자를 파견하는 문제를 한때 검토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정을 밝힌 것이다. 이 보도가 큰 파문을 일으키자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당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보도 내용은 알고 있지만, 문제의 성격상 언급을 삼가겠다”고 말했다. 보도를 부정하지 않고 “언급을 삼가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니, 기사 내용이 사실임을 인정한 꼴이었다.
북-일 간에 수면 아래서 뭔가 의미 있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란 조짐이 드러난 것은 사실 지난 5월 말께부터였다. 기시다 총리는 5월27일 납치 피해자 유족들이 모인 ‘납치 피해자의 즉시 일괄 귀국을 요구하는 국민대집회’에 출석해 지금까지 언급한 적 없던 특이한 발언을 쏟아냈다.
“나 자신, 우리 나라 자신이 주체적으로 움직여 정상 간의 관계를 구축해가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조(북한) 간의 현안을 해결하고 양자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는 관점에서 나온 내 결의를 여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정은 위원장에게 계속 전하겠다. 정상회담을 조기에 실현시키기 위해 내 직할로 고위급 협의를 해나가고 싶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02년 9월17일 평양선언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일본사진공동취재단
납치 문제 해결을 명분 삼아 일본의 총리 자리에 오른 아베 신조(1954~2022) 전 총리 역시 2019년 이후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 직접 소통하고 싶다는 뜻을 거듭 밝혀왔다. 그해 2월 말 북-미 정상회담이 실패하자 “김정은 위원장과 직접 마주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있다”고 말했고, 다시 두달여 뒤인 5월6일엔 “김정은 위원장과 조건을 붙이지 않고 만나야 한다고 결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는 이에 더해 “내 직할로 고위급 협의를 해나가고 싶다”는 이례적인 말을 추가했다. 일본의 총리가 납치 피해자 가족들 앞에서 북-일 접촉과 관련해 이런 ‘구체적’인 언급을 했으니, 북-일 간에 무언가 의미 있는 접촉이 이뤄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기시다 총리가 이런 결의를 밝힌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 유족들이 고령화돼 이 문제를 풀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77년 니가타현에서 사라진 뒤 일본인 ‘납치 문제’의 상징적 존재가 된 요코타 메구미(1964년생)의 부친 요코타 시게루(1932~2020)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가족연락회’ 전 대표는 2020년, 이후 회장직을 물려받은 이즈카 시게오(1938~2021, 납치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의 큰오빠)도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남편 시게루와 함께 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동분서주해온 사키에(87)마저 숨지게 되면, 이 문제는 미해결인 상태로 끝날 수 있다는 조급함이 기시다 총리를 움직인 것이다.
북-일 관계 전문가들은 북한의 반응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기시다 총리의 발언이 나온 지 불과 이틀 만인 29일 박상길 북한 외무성 부상이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를 내놓게 된다.
“일본은 ‘전제조건 없는 수뇌회담’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이미 다 해결된 납치 문제와 우리 국가의 자위권을 놓고 그 무슨 문제해결을 운운하며 조일 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중략) 만일 다른 대안과 역사를 바꾸어볼 용단이 없이 선행한 정권들의 방식을 가지고 실현 불가능한 욕망을 해결해보려고 시도해보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산이고 괜한 시간 낭비로 될 것이다. 만일 일본이 대국적 자세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고 관계개선의 출로를 모색하려 한다면 조일 두 나라가 서로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공화국 정부의 입장이다.”
일본과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전임 아베 총리 때처럼 “다 해결된 납치 문제”와 “우리 국가의 자위권”(비핵화)을 국교 정상화의 조건을 내세운다면, 만나더라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대꾸한 것이다. 실제 북한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의 평양 방문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식 사죄하고 생존 피해자 5명을 귀국시키면서 납치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①납치 문제는 일본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②납치 문제의 해결 없이는 국교 정상화는 없다, ③납치 피해자가 전원 생존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전원 귀환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른바 ‘아베 3원칙’을 내세우며 맞서는 중이다. 북한이 죽었다고 밝힌 이들이 사실은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돌려달라는 주장이다. 두 나라는 2014년 5월 스톡홀름 합의 등을 통해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왔지만, 이 같은 근본적인 입장 차이로 인해 2016년 초 이후 정부 간 공식 대화의 문이 완전히 닫힌 상태다.
그렇다면 북·일은 지난봄 접촉을 통해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을까. 보도를 계속 보면, 북·일의 소수 대표자들은 두차례 만나 양국 간 여러 현안에 대해 광범위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일본 정부는 북한에서 나온 조선노동당 관계자들이 북한의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김 위원장과 가까운 당의 핵심 간부와 연결되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또 “북한이 일본과 대화에 의욕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북한이 2019년 2월 말 하노이 결렬로 인해 북-미 대화가 중단되고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취임 이후 남북 관계 역시 파탄 난 상황에서, 일본을 통해 새 외교적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납치 문제에 대한 근본적 의견 차이로 인해 성과 없이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북-일 간에 있었던 이 ‘작은 실패’는 한국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반도 정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북한이 대일 접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보고 적어도 ‘7월 이후’엔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하는 쪽으로 기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7월27일 ‘전승절’ 행사에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참석한 것을 계기로 지난달 13일 4년 만의 북-러 정상회담에 나섰다.
북-일 ‘스톡홀름 합의’를 이끈 송일호 북일국교정상화 담당 대사(왼쪽)와 이하라 준이치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오른쪽)이 2014년 7월1일 중국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베이징/로이터 연합뉴스
현재로선 북-일 간에 본격 대화가 시작될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일본 내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조짐도 있다. 2013년 5월 방북해 납치 문제와 관련한 담판을 했던 이지마 이사오 내각관방참여는 월간지 분게이슌주(문예춘추) 10월호에 당시 ‘회담 기록’을 공개하며 북-일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강한 의견을 전했다. 그는 납치 문제에 대해 아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애석해하며 “지금이야말로 일본 사회 전체가 북-일 교섭의 존재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호소했다.
기시다 총리 역시 북한과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3일 가을 임시국회의 문을 여는 소신표명 연설에서 “북한과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 내 직할로 고위급 협의를 진행해가겠다”고 다시 강조했다. 이어 “지역의 평화·안정에도 기여하는 알맹이가 있는 관계를 구축해가기 위해 대국관에 근거해 판단해가겠다”고 덧붙였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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