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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세계의 창] 영광의 기억 / 야마구치 지로

등록 2021-03-21 15:39수정 2021-03-22 02:39

야마구치 지로|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올해 3월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부터 10년, 코로나19 감염 확산이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시기다. 재해나 원전 사고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는지, 미지의 바이러스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는지 되돌아보면, 일본은 선진국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통감한다.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은 역사상 최악 수준의 원전 사고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바이러스 대책에서도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두 문제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동일본 대지진 10년을 계기로 원전 사고를 검증하는 다양한 보도가 나왔다. 후쿠시마 1원전 2호기와 4호기가 폭발했다면 도쿄권도 방사성물질 오염으로 거주가 불가능해져,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이주해야 했다. 파국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천만다행으로 우연이 겹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지진학자가 거대한 지진해일(쓰나미) 대책을 요구했는데도 정부나 도쿄전력이 그것을 무시하고 방파제를 쌓는다거나 비상용 전원을 높은 곳으로 옮기는 등의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 원인이다. 원전을 둘러싼 정책 결정은 전력업계, 그것을 감독하는 경제산업성 및 원자력공학 전문가로 구성된 닫힌 커뮤니티(일본어로는 ‘원자력 마을’이라고 한다)에서 이뤄졌다. 다면적인 논의를 자유롭게 하는 민주주의 과정이 없었던 것이야말로, 대형 사고의 근본적 원인이다.

코로나19 대책도 의료정책 분야의 ‘마을’(닫힌 커뮤니티)이 총괄하면서 일본은 국제 수준에 크게 뒤떨어졌다. 일본은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억제해왔다. 무증상 감염자들이 의료기관으로 몰려들면 의료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철저한 검사와 격리로 감염을 억누른 한국과 중국과는 대조적인 대책이다. 의학자가 정부 방침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후생노동성 기술계 관료와 일부의 연구자가 정책을 주도했다. 이 구도는 원전 대책과 같다. 올해 들어 감염 확대는 진정되고 있지만 감소 추세가 멈췄고, 변이 바이러스 확산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현재 50살 이상의 일본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했고 패전 후에도 근면한 국민의 노력으로 기적적인 경제 부흥을 이뤘으며 과학기술에서 세계 일류라는 등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등의 행태를 보면, 이래도 선진국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백신을 자체 생산하지 못해 수입하는데, 그것조차 다른 나라에 견줘 뒤지고 있다. 감염자와 접촉을 확인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코코아’는 오류가 오랫동안 방치돼 쓸모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로부터 앱 개발을 수주한 회사는 이 업무를 다른 업체에 위탁하고, 이 회사는 또다시 하청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사업인데도 지극히 무책임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 한마디 추가하자면, 대학에서 연구를 둘러싼 환경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국립대학의 예산은 매년 삭감돼왔다. 대학의 상근직은 줄고 젊은 사람들이 연구자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엄청난 경제적 위험이 따른다. 과학기술의 수준이 낮아지는 것은 필연적 결과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영광의 기억을 버리고, 일본의 정책 결정 시스템의 결함을 직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점은 일본의 정치적 대립 구도와도 관련이 있다. 진보 진영은 일본의 결점을 시정하기 위해 변혁을 제안해야 한다.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 교육에서 아이들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 행정의 투명화와 다원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 등이 그 요점이다. 보수 진영은 일본의 결점을 비판하는 것이 애국적이지 않다고 반발한다. 하지만 진정한 애국심이라는 것은 자국의 실패를 직시하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변화를 일으키는 태도다. 애국심이 현상에 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일본의 앞날은 여전히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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