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홀거 하이데 | 독일 브레멘대 명예교수
우리는 포스트 트라우마 사회의 일부다. 사회 역시 포스트 트라우마 사회다. 폭력과 트라우마를 겪은 개인과 사회는 두려움에 압도된다. 이는 혁명적 비판 진영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근본 저항이 어려운 배경이다.
우리 심층부의 두려움은 이성으로 조절되지 않는다. 계속 은폐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 트라우마란 또한 예비 트라우마다. 심층부의 두려움을 제대로 직면하고 극복하지 못한 탓, 최대한 외면하고 억압한 탓이다. 이게 트라우마의 참된 해소를 막는다. 이 자기방어적 태도는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후세대로 전승, 영속화한다.(공저, <중독의 시대>(개마고원) 참조)
복합 트라우마의 뿌리는 폭력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폭력이 심리적·물리적으로 남긴 흔적이다. 이 폭력의 역사는 멀리 영국의 유혈 입법에서부터 오늘날 제국주의까지 끝없이 지속된다. 최근 수십년간 제국주의 색채의 전쟁은 대개 유럽 외부에서 있었다.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쟁이 유럽으로 귀환한 신호다.
평화로울 때 우리는 평화주의자가 되기 쉽다. 전쟁이 끝난 뒤엔 “전쟁 반대!”를 외치기 좋다. 그러나 새로운 적이 위협하면 평화의 가치를 곧잘 잊는다. 심층부의 두려움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또 이 두려움을 흥분이나 분노와 같은 더 강한 감정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게 현재 러시아 군인들에게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알 순 없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관련해선 몇몇 사례가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18~60살의 남성은 출국 금지다. 이 강제 규정이 암시하듯, ‘정의’를 위한 영웅적 희생(참전)조차 결코 당연지사가 아니다. 실제로 일부 청년은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다가 또는 넘었다가 국내와 폴란드, 몰도바 등에서 체포된다. 우리는 학대를 당해 탈영한 러시아 군인과도, 타국으로 도피한 우크라이나 청년과도 연대해야 한다.
물론 러시아 민중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푸틴의 거짓말 탓에 진실과 격리돼 있다. 그런데 독일 사회 일각에선 푸틴의 정책이 상당한 지지를 받기에 논란이 있다. 물론 러시아 민중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한다. 그들 역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푸틴조차 ‘전쟁’이란 말을 금지할 정도다. 그러나 사태를 좀 더 정확히 보면, 러시아인 상당수가 푸틴을 지지하는 것은 결국 ‘위대한 러시아’ 때문이다. 심지어 평생 차르나 스탈린 체제로부터, 그리고 그 이후 과두제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한 극빈층조차 러시아가 ‘대국’이 되길 소망한다. 이것이 곧 포스트 트라우마 행위의 특성인 ‘가해자(강자) 동일시’다.
‘서양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 집단 동일시가 좀 다른 얼굴을 띤다. 이 역시 효과가 크다. 예컨대 ‘자유’는 상승하는 ‘생활수준’이나 그 상징들로 체감된다. 그 상징의 예는 특정 소비재, 특히 자동차, ‘자유’ 여행, 그리고 ‘쇼핑 체험’ 등이다. 그러나 이들조차 사람이 느끼는 전쟁 공포감을 없애진 못한다.
독일의 경우를 보자. 설사 러시아 제재가 필요하다 해도, 만일 그것이 ‘우리의’ 생활수준을 저해한다면 제재는 안 된다. 러시아에서 가스나 석유를 사 와야 기존 생활이 유지되기에, 설사 독일이 지불하는 수십억유로가 러시아 전쟁 비용으로 쓰인다 해도 상관없다는 식! 오히려 러시아에 대비해 강력한 무장이 필요하다며 무려 1천억유로의 군비 증강론이 상당한 동의를 얻는다. 그 결과는? 양 진영 모두의 군비 증강이다! 결국 군수산업만 웃는다.
이러니 최소한의 대안도 논의되지 못한다. 예컨대 대러시아 수입 금지로 돈줄을 끊되, 그 피해자들에게 1천억유로를 (군비 대신 복지로) 쓰는 게 대안일 수 있다.
요컨대, 한편으로 ‘당연한 권리’인 생활수준 유지를 위한 조치, 다른 한편으로 최대한의 군비 증강, 이 둘의 결합이야말로 자본주의 입장에선 완벽한 답이다. ‘파괴를 통한 생산’이 곧 이윤 극대화의 기초다. 이런 뜻에서 인류 생존의 유일한 기회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부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회적 트라우마로부터 집단 치유를 하려는 의식적 결의가 필수다. 이게 참 혁명이다. ‘최후의 신성한 살육’ 같은 건 없다. 혁명이란 오직 평화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폭력 행위는 그 자체가 트라우마의 영구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