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서춘성
한겨레통일문화재단 10·19 생명평화기행 참가자
지리산에 봄이 오면 곳곳은
꽃피는 소리에 요란스럽고
지리산을 감아 흐르는 섬진강에는
바다로 나갔던 황어가 매화꽃 따라
새로운 생명을 산란하기 위해
섬진강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데
그해 시월
평화롭고 고요했던 지리산 골짜기마다
이념의 늪에 빠져 피의 능선을 넘지 못한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사람의 문턱을 넘어 사람 밖으로 사라졌다
사계절은 모두 비명에 잘려나가고
진달래 피는 봄 사월 문수골 깊은 골에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얼굴이 붉어지도록 진달래의 붉은 꽃잎 따먹고
죽은 자의 입술에 묻은 밥알까지 거둬 먹다가
뼛골까지 시린 문수골 찬바람과 안개 속에
상고대 핀 진달래꽃은 차마 따먹지 못하고
소복 입은 진달래 앞에
울고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산짐승 되어 목숨까지 버리고
이념이란 돌덩이를 품고 부화를 기다렸던
다시 못 온 당신은 누구입니까
죽은 그들의
무덤 위에 내린 눈은 모두 백설이기에
두 눈을 감아 버린 산,
뜨거운 함성을 태워 침묵하는
지리산에
새로운 생명을 품은 황어의 회귀를 따라
또 하나의 계절,
사랑과 평화의 계절이 흐르고 있다
(10·19 여순사건에 희생된 영혼들께 이 시를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