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김영철 | 포천깨시민연대 대표
이웃집 이장에게 맡겨둔 도장이
누런 갱지에 벌건 인주밥과 함께
나도 모르게 찍혔달 적에
나는 이미 산목숨이 아니었더라
초여름 신새벽 들이닥친 인민군이
내어달라는 지게를 혹여나 잃을까 하여
힘들게 지게로 짐을 져 날라준 날
엊그제 물꼬에서 다툰 게 명 재촉한 거였어라
집에 라디오도 없어 세상 소식을 모르고
보도연맹이 무언지 부역이 뭔지 알지도 못했소
누렇게 부황든 여편네와 새끼들을 보며
보리쌀 한말 준다기에 그냥 따라 갔댔소
둘러멘 따발총으로 날 겨눌까 겁이 나서
땔나무 한두단 내어주고 장작 몇개비 준 게
캄캄한 밤길 길라잽이로 마지못해 나서준 게
노역인지 부역인지도 알지 못했소
공회당으로 모이라는 칼빈총 든 순사가 무서워
아뭇소리도 못하고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소
두레에 든 이웃과 보리 갈 일 얘기하다
에무앙 총구에 옆구리를 찔려 끌려 왔구려
공회당 문이 잠기던 소리가 관 뚜껑 덮이는 소리인지도
두 손목이 뒤로 묶여 제무시에 실려 행길을 내달릴 때에도
무럭고개 중턱 누군가 파놓은 구덩이 앞에 섯을 적에도
내가 왜 말뚝에 비끌어 매이는지를
언 눔 하나 말해주는 눔이 없습디다
눈이 가리어지고
가슴을 뜨거운 것에 뚫리는 순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고
총소리가 아득하니 멀어집디다
달이 차고 기우는 걸 넋 없이 바라보며
잎이 지고 또 새순이 돋아나는 것에도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눈이 내리면 눈을 덮고
바람이 불면 서로 엉키어 묻힌 동무와 같이
몇날 몇밤을 울며 지새웠는지 모릅니다
아부지!
난 알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공회당에 붙잡혀 있을 때나
경찰서 철창 안 가막소에 있을 때나
순사들은 갇혀 있는 우리들을 보고
말끝마다 빨갱이 새끼들이라고 욕을 합디다.
붉은 양탄자 위에 빨간 잠바를 걸치고
곤댓짓을 하며 빨갱이 타령을 하는
높디높다는 놈들이
빨갱이인 줄 난 그리 알고 있었는데
세상천지 물색 옷을 입어보도 못헌 내가
빨갱이 소릴 들을 줄 꿈에도 몰랐소
엄니!
아부지 따라 같은 일일랑은 허들 마소
헌병과 청년단 시부리는 소릴 듣자 하니
그게 부역이라 합디다
부역은 빨갱이가 하는 짓이라 그럽디다 엄니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골짜기
까마귀 무리만이 가끔씩 기웃거려 보는 곳
세월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부지는
엄니는 아프신 데는 없으신지
어린 동생들 배는 곯지 않는지
마누라는 젖먹이 데리고 잘 있는지
엎어지고 자빠져 뒤엉켜 있는
여기 묻혀있는 이들 모두 그런 걱정들뿐이라우
집에 가보구 싶어두
내 모양이 하두 참혹해서 놀라실까 봐
꿈속에서라도 찾아 뵈올 엄두가 안 나니
괘씸하고 야속타 마시고 그리 아세요
뵈올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요
안녕히 계세요
상달 열이레에 불효자 아들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