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한 대학생 단체가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요구하는 택배상자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왜냐면] 김해식 | 핀란드 국립과학기술원 박사
주 52시간만 넘지 않으면 하루 최장 21.5시간 노동도 위법하지 않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는 가장 높은 강도로 가장 오래 일하는 우리나라 사회에 과로를 더욱 부추기는 판결로 논란을 일으킬 만하다. 최근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에서 분석한 2023년 부자 나라들에 관한 기사는 우리나라 노동 시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한다.
이 기사는 부자 나라들을 3가지 지표로 비교한다. 첫 번째 지표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었는데 우리나라는 31위였다. 두 번째 지표는 물가를 고려한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으로 우리나라는 30위였다. 그러나 마지막 지표에서 구매력 평가 환율 기준으로 각국의 노동시간까지 고려하자 우리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47위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는 여전히 많은 노동시간으로 높은 소득을 유지하는 나라라는 뜻이고, 주 37.5시간 정도 일하는 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그다지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10여년 전 야근과 장시간 노동은 2급 발암 물질에 해당한다는 국제 연구 결과가 나왔고, 과도한 장시간 노동이 우울증과 불안 장애에 원인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장시간 노동에 대해 엄격하다. 핀란드에서는 야간근무가 허용되는 일은 경찰, 병원, 경비 등으로 노동법에 명시돼 있고, 12시간 맞교대 근무가 불가능하며 3교대로 일해야 한다. 또한 10년 전 영국에서 경험한 일인데, 장거리 운행하는 버스에는 2명의 운전기사를 배치해 2시간마다 교대로 운행하게 했다.
핀란드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딸은 학교에서 시민학(Civics)을 배운다. 시민학 과목에서는 세금은 어떻게 계산하고, 왜 내야 하는지, 어디에 쓰는지 등을 배운다. 또 투표는 왜 해야 하는지, 노동자로서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는지, 자본가는 어떤 책임과 권리가 있는지도 배운다. 그래서 중학생 나이에 이미 기본이 되는 노동법을 숙지하고 있다. 이는 꽤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많은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고용자가 법을 위반해도 이를 모르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핀란드의 노동조합은 조직이 잘 갖춰져 있어서 노동자로서 권익이 잘 보장돼 있다. 예를 들어 한 노동자가 회사에서 불법 해고돼 회사와 긴 법정 다툼을 해야 할 경우 해당 노동조합 소속 변호사가 노동자의 변호를 맡아 준다.
선진국과 강대국 반열에 올라갔다고 하는 우리나라에서, 많은 첨단 산업을 보유하고 있어 미래지향적인 산업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높은 강도로 오래 일하는 노동 구조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휴식과 안전한 근무환경은 노동자의 권리다. 우리나라 품격에 맞는 노동법 정비와 노동법 교육으로 보다 근무하기 좋은, 그리고 안전한 노동자의 일터를 갖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