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고교 시절의 내 일기장을 보면, 느닷없이 시가 한편씩 써 있다. 일기 검사를 받을 나이가 지났는지라 날짜 메꾸기용 시가 아니다. 아마도 한국 문학전집 따위에서 베껴 썼으리라.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심훈의 영탄조 시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잘도 베껴 놓았다. 되는 일도 없는 막막한 시절, 시의 애벌레가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나 보다.
신경숙과 같은 시대를 대표할 만한 중진 작가에게도 유년의 치기 같은 것이 짤막하게나마 없었을 리 없다. 그가 모차르트처럼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기를 기대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니 그 문재(文才)의 깊이를 짐작할 수가 없다. 어쩌면 좋은 글을 옮겨 놓기도 했을 것이고, 어쩌면 옮겨 놓은 글이 쌓이고 쌓이다 그게 대체 어디서 근원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을 수도 있겠다. 오래되기도 했으니 지금 언론에 보도되는 다른 작가와의 ‘유사성’은 작가 자신이 알고 있었거나, 혹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 자신이 내놓은, 정확히 말해서는 자신의 출판사를 통해 보낸 이메일의, 말이 해독하기 난처하다. “이런 소란을 겪게 해 내 독자분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풍파를 함께해왔듯이 나를 믿어주시길 바랄 뿐이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게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 그는 왜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란 가치중립적이고 관대한, 혹은 방어적인 표현을 붙였을까.
작가에게 표절의 혐의를 두는 상대방에게 이런 방식의 대응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무리 축소시켜 생각한다 해도 작가로서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이 도발을 그는 왜 상처가 두렵다며 유보하는 것일까?
전략이라는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신경숙의 이 신속한 발언은 이해득실의 측면에서도 현명한 편이 아니었다. 인문학자 ‘로쟈’는 “메르스 사태에서도 우리가 확인했듯이 초기대응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발언하는 것은 매우 정밀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바이러스와 대적하는 인체의 생물학적 반응이 아닌 까닭이다. 대한항공 회항 사건에서의 확전은 애초에 당사자의 그릇된 오만함에서 비롯되었지만, 거기 기름을 부은 것은 발언의 실패였을 것이다.
작가나 출판사는 열번 생각해야 도달할 결론을 그저 한두번의 고민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언론에 공개된 발표문은 설득력도 미진했고 진정성마저 의심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틀에서 관찰한다면, 작가는 이 단계에서 차라리 “대응하지 않겠다”는 말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 말 자체가 일종의 대응이었고, 그것도 미궁으로 안내하는 대응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이 사안은 애초에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폭넓게 전이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이야 표절의 세부적 정도와 범위, 그리고 그것의 문학적 책임에 대해 깊이 알고 있지 못할 터인데, 이미 그런 이해가 중요치 않은 지점으로 확전된 것이다. 대중에게는 이 나라의 대표 작가에게 던져진 표절이라는 굴레만으로 입방아에 올리기 충분하다.
부디 진실 여부가 매우 ‘상관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명백히 재능있는 한 사람의 작가가 ‘만에 하나라도’ 부당한 오욕으로 상처 입는 일 또한 없었으면 좋겠다.
서동진 서울시 송파구 잠실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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