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겨레가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에 작은 힘을 보태고 싶을 뿐이다. 여야가 일상적으로 티격태격 벌이는 권력 다툼의 현상만을 쫓는다면,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파도만 보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이며, 결국 정치의 실종을 불러올 뿐이다. 출입처에 갇힌 시스템 아래서는 ‘기후위기, 불평등, 젠더, 동물복지, 민주주의’ 등의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와의 갈등 구조 속에서 제대로 분석할 수 없고 해법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다.
홍세화|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한겨레> 후원제에 참여했다. 평소 “광고와 판매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지속가능한 언론”을 소망해왔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공영텔레비전방송의 공공성을 위해 수신료를 낸다. 오늘날 신문은 방송보다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시민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까닭이다. 시민들의 여망에 응답한다는 조건이 따른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영국의 <가디언>지는 후원자가 80만명에 이른다. 일찍이 영국이 아프리카 식민지를 경영할 때 당시로서는 폭넓게 당연시되었던 대영제국의 국가이성(Raison d'Etat)을 비판하는 논조를 폈다가 10% 넘는 독자가 한꺼번에 떨어져 나가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오늘 그 역사는 가디언과 80만 후원자의 자랑거리다. 나의 후원제 참여는 오늘의 한겨레가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에 작은 힘을 보태고 싶을 뿐이다. “돈은 없어도 ‘가오’는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돈이 없으면 가오도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건대, 내 눈에 “한겨레의 가오 없어짐”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뒤 ‘김정숙 여사’로 표기하면서부터 가시화되었다. 33년 전 창간 이후 한겨레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신장을 위한 원칙의 하나로 지켜왔던 “이희호씨”, “권양숙씨” 표기에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용인했던 반면에,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김정숙씨” 표기에 절독을 위협하며 공격했는데, 한겨레는 결국 여기에 무릎 꿇고 말았다. 혹자는 이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외부의 힘에 눌려 원칙을 저버린 데서 오는 일부 구성원의 무력감과 자격지심은 은연중에 구성원 전체에게 전염될 수 있고, 지켜야 할 원칙들이 무너진다고까지는 아니라도 무뎌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온한 서생의 확대해석일 수 있겠다. 한겨레의 원칙의 무뎌짐은 문 정권의 청와대로 직행하는 기자에게서 노무현 정권 때와 달리 ‘겸연쩍음’조차 없어지게 했다. 그런 기자가 많지는 않지만, 그것이 기자가 고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기류는 신문 논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연동형 비례제의 정신을 배반하고 위성정당을 만드는 “천벌 받을 짓”(유인태 전 민주당 의원)을 저질렀을 때, 한겨레의 반응은 ‘야당에서 만드니까 어쩔 수 없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 당헌·당규를 스스로 뒤집고 서울과 부산에 시장 후보를 내는 탐욕을 부렸을 땐, 아예 후보를 내지 않으면 야당에 시장 자리를 내주는 무책임한 결과를 낳는다는 주장을 실었다. 뒤늦은 가정이지만, 만약 더불어민주당이 원칙을 지켜 시민사회에 후보를 양보하고 그 후보를 지지했더라면 거버넌스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다.
“파도를 보지 말고 조류의 흐름을 보라.” 페르낭 브로델의 말이다. 특히 한국의 정치지형처럼 노동과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 있어서 여당과 야당 사이에 별 차이가 없는 사회의 언론에는 “오직 진실만을!” 이상으로 중요한 지침이다. 이석기씨 사면 요구에는 시큰둥하지만, 삼성 재벌 이재용씨 사면에는 거의 공감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없는 여야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국 사회의 불평등 세습은 집값이 급등하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한겨레도 ‘책&생각’에서 소개한 <피케티의 사회주의 시급하다>에서 토마 피케티는 소득세를 강력한 누진세로 할 것과 개인 자산을 국가가 환수할 부유세 도입을 강조했다. 우리는 어떤가. “집값 잡으랬더니 애먼 종부세를 잡는”(안재승 <한겨레> 논설위원실장) 여당과 야당 사이에 “0.1%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 우스개일 뿐일까. 이런 여야가 일상적으로 티격태격 벌이는 권력 다툼의 현상만을 쫓는다면,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파도만 보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이며, 결국 정치의 실종을 불러올 뿐이다. 지금도 대선 후보들의 이런저런 발언들을 보도하고 있지만, 문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사항을 다시 읽어보고 “촛불아, 너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하구나”를 확인한다면, 그게 그렇게 많은 지면을 차지할 일인지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교육 관련 기사를 거의 볼 수 없는데,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 없기 때문인가,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음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인가. 파도만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금처럼 출입처에 갇힌 시스템 아래서는 ‘기후위기, 불평등, 젠더, 동물복지, 민주주의’ 등의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와의 갈등 구조 속에서 제대로 분석할 수 없고 해법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다. 노동은 두말할 것도 없다. 가령 서울 서초동에 수십만이 모여 “우리가 조국이다!”를 외쳤던 것에 비해 “우리가 김용균이다!”에는 기껏 300명밖에 모이지 않는 사회현상에 대해 그것을 평면적으로 보도하는 것으로 소임을 끝낼 수 없다. 계급적 정체성을 스스로 배반하는 그들은 누구인지, 그들을 움직이게 한 동인은 무엇인지, 스핀 닥터들과 미디어 장사꾼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치사회학적 분석과 그에 따른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해야 하는데, 한겨레도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현상만을 보도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을 때, 정치권은 움직이지 않는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이름부터 달라졌고 오늘도 내일도 노동자들의 산재 죽음은 너무나 슬프고 안타깝게도 이어지고 있다. 분노에 찬 사설 몇개 얹는 것으로 끝낼 수 없지 않은가. 요컨대, 급진성과 변혁성이 없다면,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환경을 염려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한겨레의 소명은 공염불이거나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겨레 후원회원 동참을 핑계로 시작한 글인데, 쓴소리만 늘어놓았다. 나에게 지지의 올바른 형태는 ‘비판적 지지’뿐이다. 수치화하기 어렵지만, 한겨레 논조에 나는 60% 정도 동의한다. 나머지 40% 중에는 내 인식의 잘못 탓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후원회원이 되고 쓴소리를 하는 것은 동의 부분을 5%만이라도 더 올리고 싶은 안간힘의 표현이다. 그렇게 적으냐고 반문할 분이 있겠지만, <조선일보> 따위가 판치는 언론의 장에서 그만한 신문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간곡히 호소한다. 한두개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 이제 한겨레 안 봐!” 하고 떠났던 분들에게 다시 돌아오기를, 많은 시민이 후원회원에 동참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