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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기현의 ‘몫’] 아픈 몸의 노동권

등록 2021-07-19 07:13수정 2021-07-19 09:21

조기현 작가

함께 일하는 동료는 최근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산에 들어가겠다는 아버지의 ‘선언’ 때문이다. 무작정 떠나려는 아버지를 두고 동료는 설득했지만, 도통 타협점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 아버지가 1순위로 챙겨 보는 티브이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의 영향 때문에 벌어진 듯했다.

아버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몇년 전 아버지에게 파킨슨병이 찾아왔다. 용접공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행동과 인지가 느려져 인력사무소에서 받아주지 않거나 현장까지 가서 쫓겨나는 일이 잦아졌다. 그나마 예전 현장 동료에게 부탁해서 일당을 줄여서라도 현장에 남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마땅치 않다. 이런저런 시도 끝에 한달에 서너번 정도 일을 나간다. 그 외의 시간은 자신의 쓸모없음을 견뎌내야 하는 시간일 따름이다. 만약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한다면 굳이 이 세상에 거절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삶은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동을 하고, 그 노동의 결실을 손에 쥐는 삶이다. 문제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런 삶이 불가능한 세상일 터였다.

나는 무릎을 쳤다. 그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공통점이 참 많았다. 치매가 시작된 나의 아버지는 지난날처럼 미장공으로 일하고 싶어 한다. 중장년의 두 남성은 노년이 되기 전에 각각 파킨슨병과 치매라는 노인성 질환을 얻었고, 생산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몸으로 일하고 싶어 하며 방황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두 아버지를 보며 산업화 시대를 겪은 남성의 특징을 찾을지 모른다. 자신을 돌보는 일은 안중에도 없고, 일밖에 모르고 일만이 유일한 가치라고 여기는 ‘증상’ 말이다.

하지만 적당한 ‘일’은 ‘자기 돌봄’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아픈 사람이 적정한 활동이 가능할 때 몸 상태를 고려해서 일을 하는 건 치료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치료나 회복보다 유지하고 돌봐야 하는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무작정 휴식을 강요하는 건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고, 많은 이들이 방치되는 꼴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일과 돌봄을 칼로 무 자르듯이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일과 돌봄이 잘 섞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이자 ‘다른몸들’의 활동가 조한진희는 몇주 전 함께했던 대담 자리에서 ‘아픈 몸 노동권’에 대한 논의의 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건강 격차, 산업재해, 긴 노동시간 등 아플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마련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건강할 수 있는 권리만큼이나 아파도 잘 살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노동권을 아픈 몸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건 건강과 아픔이라는 이분법을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일할 수 있는 몸과 일할 수 없는 몸을 나눠왔던 핵심적인 영역이 노동이기 때문이다.

‘아픈 몸 노동권’ 논의는 아픈 몸뿐 아니라 여성, 장애인, 노인의 노동과 연동될 수 있을 듯하다. 그 노동들이 건강한 몸, 남성, 비장애인, 젊음에 견줘서 평가되는 문제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나누는 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공정과 능력 이슈에도 아픈 몸 노동권은 할 수 있는 말이 적지 않다. 건강한 몸들의 경쟁을 전제한 이슈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에 몸을 맞춰야 하는 시대는 끝나갈지 모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생산성과 효율성을 담보한 노동의 관념은 우리 모두에게 취약한 조건으로 되돌아온다. 그 누구도 기계보다 생산적일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동료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가 아픔과 노동 사이에서 방황하는 시간이 그들만의 시간이 아닐지 모른다.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 어떻게 잘 아프고 잘 돌보고 잘 일할 수 있을지 함께 상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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