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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끝없는 말

등록 2021-08-01 21:08수정 2021-08-02 02:35

‘생각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것이 생각이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여행 때 숙소 벽에 적혀 있던 낙서였는데, 저렇게 긴 문장이 수십년 후에도 기억나는 걸 보면 퍽이나 감명을 받았었나 보다.

이론상 문장의 길이와 종류는 끝이 없다. 명사에 ‘~와’만 붙여도 계속 늘릴 수 있다(‘우리집엔 나무숟가락과 모자와 도끼와 우쿨렐레와 꽃과 나무가 있다’). 동사 끝에 ‘~고’만 붙여도 한 문장으로 날밤을 새울 수 있다(‘나는 눈을 떴고 씻었고 방청소를 했고 밥을 먹었고…’).

형광등 갈아끼우듯, 같은 틀에 단어만 바꾸면 새 문장을 무한히 만들 수 있다. 주어 자리에 100개, 목적어 자리에 100개, 서술어 자리에 100개의 단어가 있다면 만들 수 있는 문장은 100×100×100=100만개나 된다. 여기에 ‘나는 냉면과 국수를 먹었다’처럼 목적어 자리에 ‘~와’ 하나만 넣어도 1억개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더 정교하게는 문장 안에 작은 문장을 집어넣는 것이다. ‘목수일을 하는 형을 좋아하는 친구가 만든 연극을 본 우리들이 만난 배우들이 찍은 사진이 예뻤다.’처럼 명사를 꾸미는 말을 계속 덧댈 수 있다.

말은 무한하다. 무한히 바꾸고 이어붙이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세계는 시시때때로 변하고, 세계를 마주한 개인의 감각도 속절없이 변한다. 말은 세계를 담고 이해하는 데 최적의 형식이다. 우리의 문장이 진부하고 식상한 이유는 몇개 되지 않는 기성의 문장을 반복하는 게 안전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용기 없고 게으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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