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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찬의 세상의 저녁] 묵시록에 싸인 세계 속에서

등록 2021-08-17 15:02수정 2021-08-18 02:36

어떤 이의 말대로 14세기 흑사병의 창궐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중세 봉건시대 이후를 상상하게 했다면, 코로나19의 창궐은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게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핵에너지의 실체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무한 에너지에 대한 자본주의의 욕망에 가장 부합해 보였던 것이 핵에너지였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소설가

거시적 안목으로 인류 역사를 탐구하는 재러드 다이아몬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지리학과 교수는 지난 5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세계 인구의 증가 속도, 숲이 잘려나가는 속도, 기후변화 진행 단계가 예상보다 빨라 30여년 후에는 인류 문명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말했다.

지금 세계는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경고처럼 문명의 분기점에서 묵시록적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쳐 컴퓨터, 인터넷 등 정보통신기술을 중심으로 한 3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에 수평적 연결망이 구축됨으로써 수많은 골짜기를 품고 있었던 세계가 ‘평평’해졌다. 이 평면적 세계가 4차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묵시록적 사건이 코로나19 팬데믹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골짜기가 사라진 평면의 세계를 순식간에 덮쳤다. 자본주의 눈에는 하찮은 생명들의 집이었을 골짜기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바이러스가 그토록 전면적으로 세계를 덮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가혹한 역설은 자본주의의 가혹한 역설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생명 구조는 대량생산 대량유통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무한 순환 구조로, 지구로부터 무한한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다는 ‘바벨’적 욕망을 바탕으로 한다. 1970년대에 닥친 경제 위기 때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욕망을 더 적극적으로 추동하는 신자유주의로 나아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부의 극심한 편재와 함께 지구 자원을 그전보다 더 빠르게 고갈시켰다.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명료히 나타났음에도, 그래서 자본주의를 새로운 시선으로 보아야 했음에도 ‘땜빵질’만 한 채 질질 끌고 갔다. 그 결과로 나타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자본주의의 심장인 시장 기능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면서 자본주의의 토대를 허물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에는 보수주의자들이 좌파 경제학자들의 몽상으로 치부했던 정부의 기본소득 지급과 공공서비스 유지를 위한 기업의 공적 소유 등이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기본소득이 사람들을 일하지 않게 할 것이며, 기업의 공적 소유는 시장의 기능을 해칠 것이라고 비난했다. 어떤 이의 말대로 14세기 흑사병의 창궐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중세 봉건시대 이후를 상상하게 했다면, 코로나19의 창궐은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게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핵에너지의 실체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무한 에너지에 대한 자본주의의 욕망에 가장 부합해 보였던 것이 핵에너지였기 때문이다.

핵에너지는 원천적으로 지구 생태계에 적대적 물질이다. 게다가 핵폐기물은 ‘끌 수 없는 불’이자 ‘썩지 않는 가장 위험한 쓰레기’이기 때문에 핵폐기장에 영구히 저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원전이 지속해서 건설된 것은 원전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의 내통 관계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한 묵시록적 사건이 1986년 4월26일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였다. 그전에도 원전 사고가 지속해서 일어났지만 대부분 은폐되었다. 하지만 체르노빌은 은폐가 불가능했다. 규모가 인류적 재난이었기 때문이다. 폭발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의 200배에 달하는 방사성 물질이 빠르게 퍼져나가 중부 유럽과 북유럽을 덮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3개국에서만 약 840만명이 방사능에 피폭되었고, 이탈리아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15만5000㎢의 땅이 오염되었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을 증언한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 한국어판 서문에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고 썼다. 하지만 세계는 체르노빌을 빠르게 잊었다. 원전 이데올로그들이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경제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경제성의 위력이 무너진 것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겪고 나서였다.

2011년 3월11일 일본 동북부 해안에 강도 9.0의 지진 발생과 함께 쓰나미가 해안가 마을로 밀려들면서 후쿠시마 원전을 타격, 1호기 3호기 4호기 원자로에서 수소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은 2호기에서는 방사성 물질이 다량으로 유출되었다. 2021년 현재 후쿠시마 면적 2.5%에 해당하는 마을이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남아 있다. 원전 안에는 핵연료가 1000개 이상 있는데다 880톤가량의 핵연료 잔해도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고농도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오염수 방출은 일본의 문제만이 아니다. 한국·중국·러시아 등 태평양 연안 국가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인류의 문제이기도 하다. 바다는 지구의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97년 28개국이 기금을 모아 체르노빌 원자로 안에 남아 있는 연료의 영구 격리를 위해 강철 아치를 2065년까지 씌우기로 한 합의를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안전 조건이 강화되면서 원전 비용이 두 배로 늘어났다. 게다가 수명이 다한 원전 해체에 1기당 1조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어간다. 환경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시장성 측면에서도 재생에너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원전 이데올로그들이 경제성 다음으로 표나게 주장했던 것이 핵분열 과정에서 탄소가 발생하지 않아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핵분열 과정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우라늄 채굴에서부터 핵폐기장을 짓기까지의 전 과정을 보면 대부분의 단계에서 탄소가 다량으로 배출된다. 게다가 원전 건설과 운영 기간이 상당히 길어 다른 에너지원으로 탄소 배출량을 줄일 기회를 없앨 뿐 아니라 원전에서 냉각수로 사용된 후 초당 7톤 정도 배출되는 온배수가 바다 생태계를 심각하게, 끊임없이 훼손한다.

과학자들이 계산한 ‘생태 발자국’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인류 생존에 필요한 면적이 지구의 1.7배인데 비해 한국은 지금 영토의 8.5배다. 기후위기가 닥치면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큰 타격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조천호 기후학자는 “지구가 회복 불가능한 위험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2010년 대비 45%를 줄여야 하기 때문에 거대한 산업 전환이 필요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삶을 돌이켜보고 함께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고 간절히 호소한다.

2022년 3월에 선출되는 새 대통령은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과 지구의 묵시록적 상황을 냉철히 헤아려,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에 대한 창의적 전망을 국민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실천하는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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