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덴마크의 정치 드라마 <보르겐>(여총리 비르기트)을 최근 넷플릭스에서 보았다. 중도파인 제3당 대표가 1, 2당인 좌파, 우파 정당 사이에서 우여곡절 끝에 총리가 되어 리더십을 발휘하는 내용이다. 여성 총리로서의 개인적 어려움이나 정치판 권모술수도 담겼지만 연합정치의 진수가 녹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비르기트는 고비마다 좌우 정당 강경파들을 고립시키며 의회 내 과반 확보에 진력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자국 병사들이 사망하자 철군 일정을 연기하고 외려 군비를 증파하는데, 연정 내부는 물론 야당과 치열한 협상을 벌이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외교 문제에서 무엇 하나 합의점이 없는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드라마가 그린 비르기트 정치의 핵심은 유럽식 정책연합이다. 논공행상으로 내 편만 몰아주거나, 상대에게 미운 놈 떡 하나 주는 식이 아닌 매번 정책을 바탕으로 주고받기를 한다. 기업의 여성 임원 쿼터제 도입 때 우파를 지원하는 대기업 총수를 만나 업종 규제 일부를 유예하는 대신 반대를 철회하도록 담판하는 식이다.
이번 대선은 일찌감치 양자 구도, 진영 대결로 짜이고 있다. 다당제, 연합정치, 중도파, 협치로 일컬어지는 합의제 정치가 설 자리는 별로 없다. 양당제 책임정치가 나쁜 건 아니다. 정책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구조는 ‘추격의 시간’엔 꽤 유용했다.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지금 1인, 1당, 청와대 중심의 단선 정치는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한때 제3지대의 대표주자였지만 존재감을 잃어가는 인물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다. 최근 독자 노선으로 재기를 노리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그간 여러 차례 실기했는데,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진보 정당 쪽에선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네번째 대선 도전을 앞두고 있지만 갈 길이 멀다. 거대 정당들의 위성정당 전략으로 총선에서 당세가 위축됐고, 조국·박원순 사태 와중에 당 정체성도 흔들렸다. 그럼에도 심 의원은 여전히 두 거대 정당 사이의 독립변수 또는 제3지대 리더로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대주다. 그에게 드라마의 비르기트 같은 리더십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진영 대결 속에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는 이들이 또 있다. 김성식, 김관영, 채이배 전 의원은 최근 ‘민주공화국 2.0’ 프로젝트를 내놨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각자도생과 진영 대립에 머문 ‘민주공화국 1.0’에서, 시민권을 확장하고 민주적 국정 시스템과 상생의 공적 시스템을 가꾸는 ‘민주공화국 2.0’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 방안으로 승자독식에서 정책에 기반한 연합정치로의 전환, 그리고 ‘혁신-고용-복지의 패키지 딜+인적 투자’로 이어지는 ‘3+1 융합해법’을 제시했다. 청와대 비서실 대신 내각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대통령은 국가적 어젠다를, 책임총리는 재정·예산·복지 분야 정책 연정을 주도하는 식이다. 3+1 융합해법은 생산성 향상, 소득 보장, 고용 유연안정성 등을 위해 진영을 뛰어넘는 방안들을 모았다.
정책을 기반으로 하는 협치, 정책 연정은 우리에겐 낯설다. 사사건건 대립하는데 협치하라는 건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소리라는 비판도 많다. 하지만 여태껏 봐왔듯 승자독식 정치는 일방통행식 정책 주행으로 이어지면서 정책의 수용성, 현실 적합성, 합의 기반을 갉아먹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초 최저임금, 부동산, 원전, 대북정책 등에서 어떤 형태든 정책연합을 추구했다면 정책 추진도 힘을 받고, 수정이나 보완도 수월했을 수 있다. 느슨하지만 꽤 광범위한 ‘촛불연합’도 가능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내각에 야당 인사 영입을 모색했지만 단순히 사람 빼오기 식에 그쳤던 것 아닌가 싶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집권해도 독불장군식 정책 추진으로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현행 헌법의 책임총리제적 요소를 활용해 집권당 내부나 야당을 상대로 전면적 또는 부분적 정책연합을 시도해봄직하다. 예를 들어 복지 확대는 어느 정도 할지, 검찰개혁은 어떻게 마무리할지, 노동개혁은 어느 방향으로 추진할지 등을 놓고 대연정 또는 소연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 구상에서 보인 통 큰 협치의 리더십, 연합정치의 비전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선거만 염두에 두고 갈라치고 몰아치는 식으론 이번 대선에선 승리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만약 통 큰 연합정치가 실현된다면 심상정이 책임총리가 되고 김성식이 경제부총리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허황된 시나리오 같지만 백일몽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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