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 ‘하이라인 파크’. 임형남 그림
부부 건축가의 공공탐색
재작년 봄, 전 세계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 뉴욕에 갔던 적이 있다. 잘 알다시피 뉴욕은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쓸 무렵의 북경(베이징)과 같은 곳이며 세계의 수도 역할을 하는 곳이다. <열하일기>를 보면 연암은 국경에서부터 이미 앞선 문화에 대한 감동을 받기 시작하여 북경에 이르러 그 감동이 절정에 이른다. 그렇지만 무척 냉철한 지식인답게 여행의 말미에는 이성을 되찾고 중국의 화려함의 이면에 대해 성찰을 하기 시작하는데, 뉴욕은 그럴 것도 없었다. 미국에 출장 대신 관광으로 뉴욕, 특히 맨해튼을 간 것은 처음이었는데, 연암이 받은 정도의 감동이나 충격은 없었다. 큰 덩치의 건물이나 화려한 현대건축은 마치 여러 겹 덧칠한 페인트처럼 요란한 색으로 눈을 현혹시키긴 했지만 그 색이 그렇게 생생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예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일주일 동안 머물며 익히 듣고 사진으로 많이 봐서 친숙한 타임스스퀘어를 동네 공원을 지나듯 매일 스쳐 갔는데, 연말에 티브이(TV)를 통해 보았던 격정도 화려함도 없었고 적당히 낡아 있어 덤덤했다. 마치 방금 환호를 받으며 공연이 끝나고 내려진 막 뒤의 풍경 같았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맨해튼에 머무는 동안 내내 궁금했다. 그렇지만 그 느낌이 싫다거나 실망스럽지는 않았고 오히려 예상과 달리 인간미가 느껴져 좋았다. 생겨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도시에 연륜이 쌓이고 과거와 현재의 조화가 만들어지는 도시의 성장 과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꽃이 만발하는 좋은 봄날이라 ‘하이라인 파크’(High Line Park)로 향했다. 그곳은 21세기로 접어들며 가장 화제가 되었던 도시적 사건이었다. 또한 낡은 것을 폐기하며 개선이니 개혁이니 하는 명목을 들이대던 개발 지상주의자 혹은 ‘토건세력’의 독주를 멈추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이라인은 도시 한복판 낡아서 쓸모없어진 고가철도를 풀과 나무를 심고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로 재정비해 높이 9m, 길이 2.5㎞의 공중정원으로 재탄생시킨 정원이다. 그리고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우리 동네 공원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던 곳이었다.
맨해튼의 서쪽으로 흘러가는 허드슨강을 끼고 한참 걷다 보니 28조원을 투입하여 열심히 재개발을 하고 있는 허드슨 야드가 나오고, 그 중심에 ‘베슬’(Vessel)이라는 마치 나뭇가지로 성글게 짠 바구니처럼 생긴 조형물이 보였다. 토머스 헤더윅이라는 영국 디자이너가 설계한 2500개의 계단으로 구성된 전망대로, 그 계단을 오르면서 보는 허드슨강의 강변 풍경이 좋아 많은 사람이 몰리는 장소이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 먼발치에서만 보았을 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투신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며 영구 폐쇄됐다는 슬픈 소식이 들린다. 베슬을 끼고 돌아서면서 하이라인에 올라섰다. 1934년에 개통되어 기차가 도심을 통과하며 공장이나 창고와 직접 연결되도록 도왔던 고가철도는 운송수단의 발달로 점점 그 효용가치가 사라지며 1980년 이후에는 방치되어 철거 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99년 하이라인 근처 주민인 조슈아 데이비드와 로버트 해먼드에 의해 ‘하이라인의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 철도를 보존하여 도시의 전망을 살린 공원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힘이 실리면서 2004년 설계공모가 실시되어 52개 팀 중 조경회사인 제임스 코너 오브 필드 오퍼레이션스와 건축가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 조경가 피트 아우돌프의 공동설계가 당선되었다. 공사는 2006년부터 3단계에 걸쳐 시행되어 2014년 9월 완성되었다.
그곳을 걷고 있는 수많은 시민 혹은 관광객들과 함께 건물들의 옆구리를 따라가다 첼시 마켓 근처에서 내렸다. 중간중간 자하 하디드 같은 유명 건축가의 신축 건물과 오래된 건물들을 비교하며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공중을 걸어 도시를 내려다보는 새로운 시선을 경험하는 것이 신선했다.
하이라인의 성공 사례로 인해 전 세계에, 특히 우리나라에도 쓰임이 다한 철도나 고가도로를 공원이나 산책로로 탈바꿈시키는 일들이 유행처럼 번졌다. 취지는 좋지만 ‘길’을 통해 휴식의 공간이자 명소를 만든다는 게 자칫 뻔한 개발의 또 다른 형식이 되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이라인은 발상의 전환과 오래된 것을 살린 성공적인 도시재생에 미국이라는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 도시에 쌓이고 있는 기억과 시간을 보존하여 도시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노은주·임형남 가온건축 공동대표